조석 간만의 차 10m 바다를 잔잔한 호수로 만들다


중단된 제2도크 축조 완료뿐 아니라
내항 전체 도크화하느라 8년 만에 완공

외해·선거·내해 사이 수위 조절하는
최신 여닫이 방식 전기 작동 갑문 설치
10m 수심 확보 위한 280만㎥ 준설공사
국내 최초 컨테이너 전용 부두도 건설

광복 이후 제1도크 군용부두로 전용
일반 화물은 통선 거치는 비효율 감내
사업 이후 하역 능력 약 6배 늘어나며
수도권 산업항으로 기능할 수 있게 돼
▲ 365일 조석(潮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완전히 외해(外海)와 단절된 넓고 잔잔한 호수처럼 변화한 인천항 내항 전경이다. 사진 전면에서 두 개의 갑문을 볼 수 있다. 좌측의 좁은 갑문이 1만 톤급, 우측의 좀 넓게 보이는 갑문을 통해 5만 톤급 선박이 출입한다. 더 오른쪽 갑문은 예비용이다. 이렇게 호수에 철문(鐵門)을 달아 썰물 때에 물이 빠지지 않도록 닫음으로써 늘 일정하게 수위(水位)를 유지시키는 원리이다./사진제공= 인천지방해양수산청
▲ 365일 조석(潮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완전히 외해(外海)와 단절된 넓고 잔잔한 호수처럼 변화한 인천항 내항 전경이다. 사진 전면에서 두 개의 갑문을 볼 수 있다. 좌측의 좁은 갑문이 1만 톤급, 우측의 좀 넓게 보이는 갑문을 통해 5만 톤급 선박이 출입한다. 더 오른쪽 갑문은 예비용이다. 이렇게 호수에 철문(鐵門)을 달아 썰물 때에 물이 빠지지 않도록 닫음으로써 늘 일정하게 수위(水位)를 유지시키는 원리이다./사진제공= 인천지방해양수산청

인천시민의 오랜 염원이자 국가적 숙원이었던 인천항 제2도크 건설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숱한 곡절 끝에 1974년 5월10일, 착공 발파 버튼을 누른 지 8년 만에 드디어 완공에 이른다. 애초의 계획은 일제가 미수(未遂) 사업으로 남겨둔 제2도크의 축조였으나, 단순히 제2도크 건설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인천항 내항 전체를 도크화 한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로써 일제가 축조한 제1도크, 제2도크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거대 규모의 항만으로 그 면모를 일신한 것이다. '부둣가만을 연못처럼 파서 갑문을 달았던' 구 도크로부터 365일 조석(潮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완전히 외해(外海)와 단절된 넓고 잔잔한 호수처럼' 변화시킨 것이다.

▲ 새로운 도크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른 장면이다. 과거 제2도크 자리이다./사진제공=인천항만공사
▲ 새로운 도크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른 장면이다. 과거 제2도크 자리이다./사진제공=인천항만공사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갑문을 설치하여 약 151만750㎡의 내수 면적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이때 준공된 갑문, 갑거(Dock)는 갑문 1만t급 1기와 5만t급 1기이며, 5018m의 안벽을 갖추게 되었으며, 최대 5만t급 선박을 내항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한국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인 남부두 1160m(민자부두), 양곡 전용 부두 등 총 3820m의 접안 시설을 갖추어 모두 18척의 대소형 선박이 동시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인천항의 하역 능력은 1966년 142만t에서 1976년에는 872만t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총 처리 물량도 1354만t에 달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인천항이 국내 산업, 무역 및 해운 등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8년 인천항만공사가 펴낸 '인천항사'의 기록인데, 1918년 제1도크 준공 이래 발전 없이 존속되어 온 인천항이 드디어 맞이하게 된 대변화의 규모를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이 공사에는 선박의 안전에 필수적인 10m 수심(水深) 확보를 위한 280만㎥의 준설공사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갑문 개폐 광경. 갑실(閘室)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서 갑문을 열고 있다./사진제공=2018년 7월7일 KBS뉴스
▲ 갑문 개폐 광경. 갑실(閘室)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서 갑문을 열고 있다./사진제공=2018년 7월7일 KBS뉴스

민간 자본으로 내항 남측 부두에 5만t급 이하 5척의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건설된 것을 비롯해 내항 북측에 5만t급 2척이 접안 하역할 수 있는 양곡 전용 부두가 축조된 것은 전면 도크화 공사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


이 인용문은 고(故) 김홍전 인천일보 기자의 '경제전문 기자가 본 인천경제사'의 일부분이다. 완공된 내항의 규모를 설명하면서 그 특징으로 시대에 맞춰 선도적으로 건설한 컨테이너 전용 부두와 양곡 전용 부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를 내린 것이다.

특히 이 부두들은 민간 자본으로 건설된 것으로, 컨테이너 전용 부두의 경우 인천항에 비해 모든 여건에서 앞서 있던 부산항보다도 먼저 국내 최초로 축조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 부산항의 컨테이너 부두 운영은 1978년 10월에야 이루어졌다. 우리가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메시지라면 내항 완공이 '이에 그치지 않고 북항과 남항 축조에 이어 신항만 건설 구상 등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한 인천항의 끝없는 도전사(挑戰史)'의 첫 페이지라는 점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1974년 완공 당시 인천항의 규모는 주로 선박 접안을 위한 부두 규모나 하역 능력 위주의 설명이었으나, 차제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천항이 어떠한 원리와 구조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부연해 두려 한다.

선거(船渠), 곧 도크(dock)는 호수처럼 바닷물을 가두어 어느 때든 배가 들어와 접안할 수 있게 장치한 인공 바다와 부두를 일컫는다. 알다시피 바다는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다. 특히 우리나라 서해는 세계적으로도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큰 곳으로, 인천은 그 차이가 최고 10m에 이른다. 따라서 자연 상태로 인천항에 물이 차는 시간은 하루에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시간도 매일 바뀐다. 하루의 절반 동안 물이 얕아진다면 항구로서는 엄청나게 불리하다. 이 같은 자연 여건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가 도크인 것이다. 그러니까 도크는 '호수'에 철문(鐵門)을 달아 썰물 때에 물이 빠지지 않도록 닫음으로써 늘 일정하게 수위(水位)를 유지시키는 원리이다. 이 '철문'을 갑문이라고 한다.

▲ 인천항 내항 전경. 제1도크뿐이었던 인천항이 1974년 5월 내항 전체를 도크화하는 대역사 끝에 오늘날 이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진 중앙 좌측의 '_'형 선거가 과거 제1도크 자리이고, 그 오른쪽 '_'형 선거 한가운데 짧게 돌출한 작은 선거를 가진 일대가 과거 일제가 공사를 중단했던 제2도크 자리이다./사진제공=인천지방해양수산청
▲ 인천항 내항 전경. 제1도크뿐이었던 인천항이 1974년 5월 내항 전체를 도크화하는 대역사 끝에 오늘날 이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진 중앙 좌측의 '_'형 선거가 과거 제1도크 자리이고, 그 오른쪽 '_'형 선거 한가운데 짧게 돌출한 작은 선거를 가진 일대가 과거 일제가 공사를 중단했던 제2도크 자리이다./사진제공=인천지방해양수산청
▲ 같은 날 미 해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제1도크를 좀 더 근접해서 찍었다. 인천항 전면 도크화 이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같은 날 미 해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제1도크를 좀 더 근접해서 찍었다. 인천항 전면 도크화 이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972년 10월6일자 조선일보는 제2도크 공사 완공 2년을 앞두고, 이 같은 원리를 가진 인천항의 갑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1만t급 이하가 드나들 왼쪽 통로와 5만t급 큰 배가 드나들 오른쪽 통로에 합계 6짝의 문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첫째 갑문을 열면 외해와 선거(船渠) 안의 수위가 같아지고 배가 들어올 수 있다. 배가 선거 안으로 들어오면 첫째 문이 닫히고 내해를 통한 셋째 문이 열려 수위가 이번에는 내해와 같아진다. 또 하나의 문은 보조 역할이다. 이런 식의 입항은 수위가 다른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파나마운하와 같은 방법이다.

그러나 파나마운하와 도크를 가진 세계의 모든 주요 항구의 갑문은 미닫이식의 재래식이다. 인천의 공사가 몇 해나 늦어지고 기술 용역비를 낭비한 것은(미국 PAE사, 불(彿) 소그레아사에 거의 50만 달러가 나갔다.) 바로 이 갑문 형식을 미닫이식이 아닌 옆으로(창호문처럼) 여닫는 새로운 방식을 택한 데 있다.

불(佛) 당케르크나 르아브르 항 등 유럽에 겨우 몇 개가 있는 방식이다. 문이라지만 보통 규모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5만t급이 드나들 오른쪽의 큰 문 1짝의 크기는 가로 38m, 높이 18.5m, 두께 14.5m의 철제(鐵製)로 1000t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얼른 그 규모가 떠오르지 않으면 서울 종로에 있는 YMCA본부 빌딩과 크기와 무게가 같다고 생각하면 거의 정확하다. 이 거대한 문이 밑에 바퀴가 달려 전력(電力)으로 물속에서 좌우로 움직인다. 이 문의 조작(操作)에 성공하는 것이 인천항 건설의 핵심이다.”


이것이 동양 최대, 유일의 인천 내항이 보유한 갑문의 대략적인 기능과 구조이다. 흥미로움과 함께 이 기사를 통해 인천항 선거 공사, 특히 갑문 공사가 실로 대단한 역사(役事)였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갑문에는 더욱 전문적이고 다양한 기술적인 설비, 장치들이 있으나 그에 대한 소개와 설명은 생략한다.

거듭 반복해 이야기하거니와, 그나마 인천항 제1도크는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줄곧 군용부두로 전용되어 왔다. 그 때문에 인천항은 산업항으로서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일반 화물은 외항의 선박에서 통선(通船)으로, 통선에서 다시 육지로 양륙하는 2중 하역의 비효율 속에 비용과 시간의 낭비를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1945년 9월8일, 일제 패망 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 해군 사진본부에서 촬영한 인천항 항공사진. 사진 중앙의 작은 직사각형이 제1도크이고, 그 옆 큰 직사각형의 풀장 같은 것이 일제가 축조 공사를 중단했던 제2도크이다./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1945년 9월8일, 일제 패망 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 해군 사진본부에서 촬영한 인천항 항공사진. 사진 중앙의 작은 직사각형이 제1도크이고, 그 옆 큰 직사각형의 풀장 같은 것이 일제가 축조 공사를 중단했던 제2도크이다./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서울의 외항인 인천이 커버해야 되는 경제권의 규모는 우리나라 총인구의 34%, 면적의 32%, 광공업 생산액의 40%에 이르고 있다. 이 화물량을 2중 하역 또는 부산을 통한 철도 수송으로 공급하는 바람에 생기는 하역비 손실이 또한 25억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천항 제2선거 공사를 해야 했던 근거다.”


같은 날짜 조선일보 기사는 거대한 내항 공사의 당위성을 새삼 이렇게 강조해 쓰고 있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