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현대 전쟁사에선 두 상륙작전을 빼놓지 않고 거론한다. 노르망디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이다. 노르망디상륙작전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6월6일 미·영 연합군이 독일 치하의 프랑스 노르망디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벌인 작전이다. 이 작전 성공으로 연합군은 그해 8월25일 파리를 탈환했다. 연합군이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인천상륙작전 또한 아주 유명하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9월15일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심한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상륙작전을 펼쳤다. 이 상륙작전으로 하루 아침에 전세를 확 바꾸었다.

지상군 7만5000여명과 함선 261척을 동원해 벌인 인천상륙작전. 작전 성공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해 국가존망의 위기를 넘겼지만, 인천에 남긴 전쟁의 상흔은 너무나 깊었다. 먼저 작전에 앞서 엄청난 함포사격을 가해 중구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1883년 개항 이후 세웠던 '아름다웠던 도시'가 송두리째 날아갔다. 물론 일제 강점기가 낳은 계획도시였지만, 대부분의 건물과 거리를 파괴했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황을 일거에 바꿨지만, 인천엔 뼈아픈 상처를 준 일도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지역이 고통에 시달렸지만, 특히 인천이 겪은 물리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막대한 고통과 피해를 안긴 전쟁은 끝나고, 시나브로 우리나라가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면서 인천에선 상륙작전을 기리자는 활동이 펼쳐졌다. 그래서 건립된 게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연수구 옥련동)이다. 지난 1984년 시민 성금 15억원과 시비 28억원 등 총 43억원을 들여 세웠다. 인천시민들의 용기와 순수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상륙작전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날려버렸지만, 인천은 그 시절을 잊고 복구·재건에 힘을 쏟아 내일을 기약했다. 지금도 기념관엔 수많은 관람객이 찾아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와 배경 등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엔 '구시대 상징물'이 있어 논란을 빚는다. '대통령 전두환' 이름으로 새겨진 석판이다. 따라서 인천시가 기존 석판을 새로운 시설물로 교체하는 비문 정비 계획을 세웠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은 지난해 '전두환 미화 시설물 청산'과 '군부독재 흔적 지우기' 여론이 비등하자, 지속적으로 검토한 끝에 결정했다. 보훈단체와 학계 등의 의견도 수렴했다. 시는 현판과 함께 헌시 비문도 함께 바꾸기로 했다. 시대적 흐름에 맞춰 '반공'이 아닌 '남북 평화' 주제를 담는다는 구상이다.

자유와 민주의 수호를 위한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건립 취지에 맞지 않는 석판은 없애야 마땅하다. 민주주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낯뜨거운 과거사를 청산해야 하는 일은 당연하다. 시민들을 부끄럽게 해선, 역사의 과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인천시민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지향한다. 오늘도 전국적으로 이어지는 '전두환 미화 시설물 없애기'를 보면서 역사의 심판을 새삼 느낀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