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엔 대나무처럼

딱딱하고 완고하게

때론 잘 휘는 버드나무처럼

능수능란하게 몸을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충 눈을 감는다

불합리에도 내 일이 아니고

거짓에도 피곤이 몰려온다

예민하고 민첩한 이성은

이미 바닥에 깔려 있다

누구나 매일 밟고 있는 바닥

바닥을 친 삶이 있다

그러나 결국 무릎 꿇지 않는 바닥은 없다

엎드려 절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온전히 받아주는 바닥

무릎 꿇지 않는 과학과 철학과 종교는

모두 가짜다

절벽을 오른다

불안도 누리는 것

바람은 무릎에서 울고

골짜기는 하늘 끝까지

깊은 발자국을 남긴다

다시 바닥으로 내려갈 때인가

삶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진다

 

▶ 살아갈수록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만 한다. 그 사이 “예민하고 민첩”했던 이성은 둔감해지고 내 일이 아닌 불합리에도 “대충 눈을 감는”. 이미 바닥에 깔려있는, 한때는 이상이었던 것들. 우리가 매일 밟고 있는 바닥. 한때 우리가 믿었던 진리는 인간들의 슬픔과 절규를 모두 받아준다. “엎드려 절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온전히 받아주는 바닥”. 시인은 절벽을 오르다 이미 버리고 왔던 바닥을 생각한다. “다시 바닥으로 내려갈 때인가” 너무 멀어진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오늘 다시금 바닥을 생각한다.

/권경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