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인천은 마치 근대문명의 '실험실'로 간주됐다. 어떤 면에선 '식민도시'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을 주축으로 도시계획을 짜고, 침략을 목적으로 세운 도시여서 더 그렇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한 터에, 조선인들은 어쩌지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요즘 인천에서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자는 목소리에도 까닭이 있다. 지나간 역사를 결코 잊어선 안 된다는 믿음에서다.

근대화 시절 인천 발전에 속도를 낸 일로 경인철도 개통을 지나칠 수 없다. 일제는 경인선 철도를 놓음으로써, 물자 수탈과 나아가 전쟁 야욕의 발판을 마련했다. 아울러 수많은 조선인과 외국인의 인천 방문을 부추겨 인천이 앞으로 나아갈 기폭제 구실을 했다. 이들은 근대 문명의 상징인 기차를 타고 인천에 도착해 갖가지 새로운 문물의 유입을 똑똑히 보았다. 인천항을 비롯해 정박중인 거대한 기선, 신도시처럼 설계된 도시공간, 이국적 건축물 등을 견학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대개 경성(서울)에서 온 방문자들이 신문과 잡지 등에 '인천 기행문'을 기고한 것만 봐도 이들의 심정이 금방 읽힌다. 인적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인철도 탄생 비화를 한번 보자. 고종 황제는 1893년 경인간 철도 건설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미국인 제임스 모스와 철도 부설권 약정을 맺었다. 그런데 인천에 살던 모스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넘겼다. 이후 1897년 3월22일 쇠뿔고개(현 경인전철 도원역 인근)에서 기공식을 갖고, 1899년 9월18일 제물포∼노량진 간 33.2km의 경인철도 1차 구간을 개통했다. 이듬해 한강철교를 완공해 경인철도는 서울역까지 연장됐다. 인천이 국내 1호 철도 기공지이자 시발지임을 말해주는 정황이다.

경인철도 개통 이후엔 변화가 무상했다. 우선 물류 운송 수단이 배에서 철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천항 개항으로 외국산 수입물품이 폭증하면서 한강 수운이 활성화해 일본·독일·미국 등의 상인들이 다투어 배를 운항했으나, 결국 운임이 싼 철도에 밀려나 쇠퇴했다. 그리고 1915년쯤엔 인천∼경성 기차통학이 본격화했다. 통학생이 부쩍 늘면서 3·1운동 직후 인천한용단과 같은 친목회를 결성해 일제에 맞선 일을 간과할 수 없다.

축현역(현 동인천역)에선 1920년대 전국 명승지를 여행하는 특별 열차를 운행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특히 당시 인천에서 금강산 여행을 할 수 있었다. 1925년 가을 4박5일 금강산 단풍놀이 관광객(탐승단)을 모집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10월5일 오후 8시55분 축현역을 출발해 원산에 이른 후 6일 오후 장전역에 도착했다. 해금강-온정리-옥류동-구룡폭포-만물상 등을 관람하고, 9일 오전 8시50분 축현역에 도착했다. 지금은 엄두를 내지 못할 축현역 발 금강산 열차 기행처럼, 하루빨리 남북철도가 연결돼 동유럽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가는 날을 고대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