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증발 일본군, 포로를 안주로 먹다


태평양전쟁 초반 '기세등등'
전황 6개월 만에 열세로 반전
보급로 끊기자 잇딴 식인행위

오가사와라 제도 치치지마 주둔
다치바나 중장, 연회 안주에 불만
처형시킨 미군 인육 먹으며 즐겨
전후 사형선고 받고 교수형 당해
일본 극우세력 '법무사'로 옹호

◇ 곳곳에서 발견된 일본군의 식인사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남방기행 이인신씨의 수기집에 따르면 1945년 2월 초 체르본섬에서 일본인을 따라간 동포 한 명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조선인 몇 명이 무인도에서 실종된 그 조선인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허벅지살이 포를 뜬 것처럼 도려내져 있었다. 결국 “일본인에게 잡혀 먹히나, 굶어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라며 군속노동자 박종원씨 등 조선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일본군 7명을 죽이고 봉기를 일으켜 체르본섬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근처 루코노루섬의 일본군이 출동해 193명의 조선인 군속 중 125명이 죽고 68명만 헤엄을 쳐서 표류하다 미군함정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이는 미군이 1945년 3월18일에 촬영한 밀리환초 조선인 군속(노예노동자) 구조현장 사진과 합치된다.

이같은 일본군들의 식인사건은 ▲밀리환초 조선인 식인사건 ▲일본군, 치치지마 미군조종사 '인육식' ▲일본군, 호주군 '인육식' ▲일본군, 뉴기니 원주민 '인육식' ▲일본군, 일본군 내부 식인 ▲일본군, 위안부 식인사건 등이 미군, 호주군, 뉴질랜드군의 재판기록 등에 보고돼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치치지마 미군조종사 식인사건'을 재판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 '치치지마 사건'으로 사망한 전쟁 포로의 유해를 찾는 미군(1946년).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치치지마 사건'으로 사망한 전쟁 포로의 유해를 찾는 미군(1946년).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소심한 일본인'에서 '광란의 식인부대'로

중일전쟁(1937~1945년) 당시 한 일본군은 자신의 일기에서 “요즘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죄 없는 중국인들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장작불에 밀어 넣어 몽둥이로 때리거나 혹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라고 쓰여져 있다.

전쟁터에서 이미 인간성이 사라진 미친 일본인은 평소 일상에서 조용하고 소심한 일본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전후 70~80여년이 흘렀지만 일본군의 야만적 잔혹행위, 포로들의 대량학살, 강간 및 생체실험, 강제노동은 오늘날까지 한국, 중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인들에게도 '집단악'으로 기억되고 있다.

중일전쟁 초기, 미국은 중국에서의 일본 철군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1940년 9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미국은 즉각 일본으로 향하는 철강 원료 및 석유 금수 조치를 취했다. 이에 일본은 1941년 12월7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반에 남태평양과 필리핀 등을 점령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 6개월 후, 미국과 연합국은 미드웨이해전(1942년 6월4~7일), 과달카날 전투(1942년 8월7일~1943년 2월9일), 필리핀해전(1944년 6월19~20일), 레이테만 해전(1944년 10월23~26일) 등에서 연전연승했다.

연패한 일본군은 1943~1945년 시기에 마셜군도, 오키나와, 솔로몬군도 등 태평양의 각 섬에서 식량과 군수물자가 끊어진 채 고립되었다. 열대섬에서 고립이 장기화된 일본군은 기아에 허덕이다가 인육까지 먹게 됐다. 이같은 식인의 환경 속에 남태평양 밀리환초 체르본섬의 조선인 군속노동자(군부, 인부)들도 잡혀 먹힌 것이었다.

전후에 열린 도쿄전범재판의 기록(1946년 12월11일)에 따르면, 1944년 12월 뉴기니 전선에서 일본군 제18군사령부는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 내부 식인행위를 한 병사 4명을 처형한 기록도 있다.

▲ 다치바나 요시오 중장이 1945년 9월3일 치치지마에서 항복문서에 사인하고 있다. 그는 미군조종사들을 처형해 술안주로 먹은 혐의로 처형됐다.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다치바나 요시오 중장이 1945년 9월3일 치치지마에서 항복문서에 사인하고 있다. 그는 미군조종사들을 처형해 술안주로 먹은 혐의로 처형됐다.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치치지마 일본군, '술안주'로 미군 조종사 식인

일본군 육군 다치바나 장군, 해군 모리 제독 등은 1945년 2월23일~25일 서태평양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서 미군포로를 처형해 연회에서 '술안주'로 먹었다. 식인사건은 3월9일, 8월7일 등에도 잇달아 일어났다. 조종사 7명, 통신병 1명 등 미군포로 8명이 희생됐다.

1946년 괌에서 열린 군사재판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군의관은 “다치바나 장군이 장교들을 위한 연회 자리에서 술 안줏감으로 미군포로의 인육을 준비하도록 시켰다”고 증언했다.

1947년 1월13일 괌 재판에 제출된 다치바나 사령관의 부관 마토바 소좌의 진술서에도 식인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마토바는 “인육사건은 1945년 2월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다.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다.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오갔다”고 진술했다. 또한 “나중에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다. 그러자 다치바나 중장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육류와 술을 준비할 무슨 방도가 없냐고 물었다. 장군은 내게 미군의 처형에 대해 물으면서 인육을 얻을 수 없겠냐고 했다. 그래서 인육과 술 1되를 준비시켰다”고 진술했다.

증언에 따르면 다치바나 장군은 이날 미군의 손발 고기와 내장을 먹고서 “이거 맛있다. 한 접시 추가”라고 기뻐했고, 모리 해군 제독은 “다치바나 장군, 미군 놈들 고기는 매우 질기구만… 차라리 위안부들의 고기를 배급해주게…”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 희생된 미군 조종사들은 7명이다.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를 위해 치치지마를 사전 폭격하다 추락한 제51뇌격대의 조종사들이다. 훗날 미국의 41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부시 중위는 당일 조종사로 출격했다가 함께 피격당했는데, 미군 잠수함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 괌재판부가 미군 조종사들을 처형해 술안주로 제공한 다치바나의 부관 마토바 소좌을 심문하고 있다. 마토바는 1947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괌재판부가 미군 조종사들을 처형해 술안주로 제공한 다치바나의 부관 마토바 소좌을 심문하고 있다. 마토바는 1947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괌군사재판, 식인 범죄자 5명 사형선고

재판은 시체 훼손·포로 살해 등의 혐의로 진행됐으며, ▲다치바나 요시오-주범 ▲마토바 스에오-다치바나의 전속부관 ▲요시이 시즈오-해군대좌 ▲이토 키쿠지 ▲나카지마 노보루 등 5명은 혐의가 인정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대에서 나카지마 노보루는 “포로가 되면 역적으로 취급하는 일본의 국가적 풍토가 결국 외국인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로 발전한 것이다. 포로 학대는 일본 민족 전체의 책임이다. 나는 국가를 증오하면서 죽어간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이들은 사형집행 당일까지 미군들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5명 중 2명은 집행되기 전에 맞아 죽었다. 다치바나는 수감기간 1년여 동안 미군 헌병들에게 거의 매일 맞았다. 사형집행 당일에도 인사불성이 되어 유언도 못남기고 교수형당했다. 그러나 다치바나는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22 순국 열사의 비'에 올라갔다.

모리 제독은 종신형을 받았지만, 남방전선에서의 포로 학살로 네덜란드 측에 의해 다시 기소되었고, 결국 중기관총으로 총살당했다.

현재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인육식'을 한 다치바나 등의 사형에 대해 '법무사(法務死)'라는 신조어로 표현한다.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뜻이다. '식인'이 죄가 없다니?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1945년까지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에서 강제동원, 위안부, 생체실험, 집단살육, 강간, 식인 등을 저질렀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장래에 '소심한 일본인'들이 '미친 군국주의자'의 선동에 이끌려, 아시아에서 다시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김신호 기자 kimsh58@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