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수탈의 도구…노선 비껴가면서 '침체의 늪'

1904년 러일전쟁 앞두고
군수물자 조달 이유 서둘러 완공
경제·정치 복합적 목적 제외

일, 철도 중심 유통구조로 개편
교통 요충지 안성 '엄청난 피해'

민중 저항의식 갈수록 높아져

내륙 교통의 요충지였던 안성은 조선 시대 시장(장터)이 번성한 3대 상업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본이 경부철도를 개설하면서 모든 게 뒤바뀐다. 일본은 1904년 발생한 러일 전쟁 직전 손쉬운 군수물자 조달 등의 이유로 경부철도를 빠르게 완공해야 했다. 또 추풍령 등 산악지역도 피해 가야 했다. 결국 경부철도 노선에서 안성은 제외됐다. 경부철도가 개통한 이후 일본은 철도 중심으로 유통구조까지 개편하면서 안성 지역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 이 때문에 안성 민중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 1970년대 안성역 모습. /사진제공=국가기록원
▲ 1970년대 안성역 모습. /사진제공=국가기록원

▲안성 사통팔달 요충지 '상업 도시'

안성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상업 도시였다. 18세기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지리책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안성은 경기와 호남 바닷가 사이에 위치해 화물이 쌓이고 공장(工匠)과 장사꾼이 모여들어서 한양 남쪽의 한 도회가 됐다”고 묘사했다. 같은 시기 서영보, 심상규 등이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선 안성 읍내장이 전국 5개 대시장에 포함돼 있다.

이러한 안성장의 발전은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허생은 안성장에서 매점매석 행위를 통해 전국의 물가를 농간할 수 있었다. 즉 안성은 전국을 무대로 하는 안성장을 품은 사통팔달 '요충지'였던 셈이다.

당시 안성은 각 지방에서 서울로 향하는 산물의 중간집산지 기능을 했다. 또 경기 남부 내륙지방뿐만 아니라 충청 북부 지방까지도 상업 배후지였다.

각지에서 안성으로 운송된 물자는 대부분 육로로 수원을 거쳐 서울로 운반됐고, 일부는 서해안의 포구를 거쳐 인천으로 운반됐다. 중부내륙지방에서 소비되는 외부 물자 역시 안성을 거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안성장은 개항 이후 외국 상인들이 상품을 팔기 시작한 뒤에도 경기 남부와 충청 내륙지방의 상업중심지였다. 내륙 운송로를 통해 서울 등 주요 상업지 대부분 연결됐다. 안성은 그야말로 상업 도시였다.

▲일제수탈 도구 경부철도 … 안성 비껴가면서 '비극의 불씨'

중국 침략을 노린 일본은 1904년 조선을 수탈할 목적으로 경부철도를 개설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가 저술한 일제 침략과 한국철도(1892~1945)에 따르면 일본은 경부철도를 통해 조선의 정치·군사·사회·경제를 한 번에 지배하려 했다. 기존에 형성됐던 물자유통이나 지역개발 등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결국 상품 유통구조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안성은 엄청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경부철도 부설을 1880년대부터 한국침략론 등장과 함께 청일 전쟁기에 구체적으로 구상했다. 일본은 경부철도 노선 선정을 위해 대규모적인 현장 답사를 5회나 했다.

당시 일본외교문서 제29권 325문서에 따르면 제1차 답사는 1892년 8월 일본군 요청에 따라 부산주재 영사 주관으로 했다. 노선은 서울(남대문)~안성~진천~청주~문의~상주~대구~밀양~삼랑진~부산진으로 선정했다.

제2차 답사는 1894년 11월 청일전쟁 중 일본군부가 했다. 제2차 답사 특징은 노선 중간 지점에서 추풍령을 횡단하며 영동을 경유하도록 한 점이다. 일본군부는 서울과 부산을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게 신속한 병참 수송을 위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제3차 답사는 1899년 3월 경부철도주식회사 주도로 했다. 제3차 답사는 우리나라 상공업이 발달한 경제적 선진지역을 경유한다. 이때까지 경부철도 노선은 안성을 지나가도록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제4차 답사부터 경제·정치 등 복합적인 목적으로 노선을 선정하면서, 안성은 제외된다. 제4차 답사는 1900년 3월 일본군과 경부철도주식회사 등의 합동으로 이뤄졌다. 제4차 답사는 제3차 답사처럼 경제적인 측면을 중시하면서도 군사적인 면을 고려했다.

러일전쟁을 앞뒀는데 여러 산맥을 뚫어야 하는 등 여건상 복합적인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북부선에선 전의~회덕~영동 등 직행선이 됐고 남부선에선 대구~청도~밀양~삼랑진~초량~부산진 등 평지선이 됐다. 안성은 배제된 것이다.

러일전쟁 직전에 진행된 제5차 답사에선 전쟁의 병참로를 위해 부산~서울~만주의 열차 운행시간을 최대한 단축했다. 또 공사비 절약을 위해 북부에서 전의~영동~회덕을 잇는 직행선을 채택했다. 이 노선은 오늘날 경부철도와 거의 일치한다.

서울과 부산(441.7㎞)을 연결하는 경부선 철도는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1904년 12월27일 완공됐다. 정재정 교수는 이를 두고 “경부철도는 각 지역을 균등하게 발전하기 위한 점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며 “태생적 결함을 안고 탄생한 기형적 노선”이라고 말했다.

 

/이명종·최인규 기자 choiinkou@incheonilbo.com


 


 

[인터뷰 /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

“철저히 일 입장서 만든 경부철도... 지역 균등 배제된 기형적 노선”

“경부철도는 철저히 일본입장에서 만들어졌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특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정재정(사진)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29일 인천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당시 러일 전쟁과 다수 열강이 우리나라에 철도 부설권을 요구하는 상황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해 현재 철도를 개설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정 교수는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간사 등을 역임한 한일관계사의 전문가다. 철도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전반적으로 분석한 적도 있다.

경부철도는 우리나라의 상공업이 발달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개설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선 형태도 아니었다. 일본이 5차례에 걸친 현장 답사를 하며 이 같은 특성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형적 노선'이 됐다.

정 교수는 당시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봤다. 철도가 대도시를 지나며 이익을 낼 수 있어야 했고 빠른 시간내에 개설하기 위해 산맥을 피해야 하는 등 이유가 있었다.

정 교수는 “어느 하나만으로 명확한 설명은 힘들다”며 “일본은 당시 러일 전쟁을 앞두고 철도를 통해 병참 수송을 신속히 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직선으로 철도를 놓기엔 여러 산맥을 뚫어야 했고, 다수의 열강이 우리나라에 철도 부설권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이어 정 교수는 “이 때문에 일본은 나름 최대한의 타협점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오늘날 경부철도”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철도에 많은 사람의 애환이 담겨있다고 했다. 지역마다 경제적 상황을 완전히 바꿔놓기도 했지만, 노동 착취가 빈번했고 적절한 보상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철도 탓에 가옥과 토지를 내놔야 했고 조상묘도 파괴되곤 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사형당한 사람도 전국에 35명이나 됐다”며 “역사에 무언가를 가정한다는 건 불필요하다. 그러나 역사를 만드는 오늘날 우리는 이 같은 점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종·최인규 기자 choiinkou@incheonilbo.com

 

 

[취재후기]

인천일보가 철도에 관심을 갖고 취재하기 시작한 것은 교통의 요충지였던 안성시에 “왜 철도가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다.

안성 지역 촌로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당시 대지주들이 일제의 철도를 반대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양반의 도시에 철마가 달린다는 것이 “웬 말이냐”며 지역민들이 거세게 저항한 탓도 있었다고 한다. 안성 지역에선 이런 내용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천일보는 지역 향토가와 사학자들을 만나고 논문, 사료를 찾으면서 안성에 철도가 없는 이유를 찾아봤다. 그 결과 안성 철도의 숨은 이야기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과 맞닿아 있었다. 안성 철도는 일제 수탈의 상처를 117년 동안 간직하고 있던 셈이다. 그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지면에 게재한다. 이번 취재에 협조해 준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 허영란 울산대 교수, 홍원의 안성맞춤박물관 학예사, 이규민 국회의원 등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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