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척이 났다. 누구지?/내 손을 뒤로 모아 그는 노끈으로 묶는다.

종이상자를 접어/나의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놓는다.

나는 눈을 크게 뜬다./내가 잃었던 생각의 자유들이

전부 여기에서 흘러넘치고 있구나.

날이 추우면 고드름이 되겠구나. /그러다가 날이 풀리면

나는 손이 끈적해지겠구나.

또 하나의 종이상자를 접어 그는 내 손에 쥐어준다.

아. /나는 이렇게 탄성을 흘리고 싶구나.

너의 촉감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종이상자를 종이상자에 담아

리본을 묶는 법을 /그는 나의 등에 적어준다.

그런 다음에 노끈을 풀어준다. /그의 뜻이/찌르르 나에게 닿는다.

 

신해욱 시의 언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시 또한 담담한 고백체와 간결하고 평이한 일상어로 직조되어 있다. 얼핏 쉬워 보이는 이 시에서, 그러나 그 말의 방향과 정체를 단번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엘리엇이 한 평론에서 “시란 이해되지 않고서도 전달될 수 있다”라고 한 것처럼, 신해욱 시의 모호함은 독자를 혼란시키는 만큼이나 매혹시키며, 갈피를 못 잡긴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들게 한다.

이 시는 두 가지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하나는 '나르시스적 존재 주체'(의식, 에고)의 목소리이며, 다른 하나는 '말하는 주체'(무의식)의 목소리다. 예를 들어, “기척이 났다. 누구지?/…/나는 눈을 크게 뜬다”까지의 언술은 의식(에고)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뒤의 언술 “내가 잃었던 생각의 자유들이/…/나는 손이 끈적해지겠구나”는 말하는 주체(무의식)의 산물이다. 이렇게 이 시는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교차하면서 진술되는데 그것이 서로 충돌하고 분열되면서 독자들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신해욱의 이런 매력은 무수히 반복되는 1인칭 '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 비롯된다.

주목할 것은 무의식의 심층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나'의 모습이 결코 분열의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해욱의 시는 자기 소외/자기 발견, 타자/나, 분열/통합이 서로 긴장하고 보완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이 시의 맨 마지막 두 연 “그런 다음에 노끈을 풀어준다./그의 뜻이/찌르르 나에게 닿는다”는 언술에 주목하자. 이때 '그'는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를 노끈으로 묶고 노끈을 푸는 과정이 마치 어릴 적 손목을 움켜쥐고 손바닥의 피를 차단하는 장난을 연상케 한다.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한 뒤 움켜쥔 손목을 풀면 '찌르르' 전기가 통하듯이, 노끈으로 묶여 있을 때의 '나'는 분열된 상태지만 그것을 풀었을 때 '찌르르' 느끼는 전율은 분열된 '나'의 소통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기 소외가 자기 발견의 계기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우리는 '대상화된 나' 혹은 '타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될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타자는 남이 아니다. 나를 구성하는 또 다른 나이다.

 

/강동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