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깃덩이로 죽을 운명에 맞서 생환의 길 열다

1945년 2월 초 체르본섬
동포 사라져 조선인들 술렁
어느 날 인근 무인도서
허벅지살 잘려진 시체 발견
그리고 며칠 뒤 잇따른 실종

“잡혀 먹히나 굶어 죽으나”
봉기 일으키고 탈출 시도
일본군 본부로 배신자 고자질
이튿날 기관총 세례 퍼부어
닥치는 대로 조선인 학살
193명 중 68명, 미군에 구조

◇ 밀리환초 조선인 식인사건과 봉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2006년 일제가 남태평양 마셜제도 밀리환초에서 조선인 군속(군부, 인부)을 집단 학살했다는 기록이 담긴 일본의 공식문서를 발견했다.

밀리환초 체르본섬에서의 학살사건과 관련해 진상규명위가 발견한 이 문서는 1952년 일본 제2보건국(옛 일제 해군성) 직원이 작성한 '구(舊)해군 군속 신상조사표'로, 여기엔 당시 조선인 군속들이 무차별하게 총살당한 경위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신상조사표의 기록에 따르면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밀리환초에 주둔한 일본군은 미군 함정의 봉쇄작전으로 보급로가 끊기자, 여러 섬으로 군대를 분산 배치해 식량을 자급자족 하도록 했다.

그러나 1945년 3월 18일 일본군이 주둔했던 섬 중 하나인 체르본섬에서 조선인 군속들이 일본인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기관총을 가진 일본군 토벌대를 이 섬으로 보내 대다수 조선인을 반란죄로 총살했다는 것이다. 신상조사표엔 이런 사실을 당시 조선인 학살에 직접 참여했던 나카가와 기요히토(中川淸人) 대위가 증언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와함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마셜제도의 밀리 환초에 강제 동원됐던 이인신(당시 83세), 김재옥(당시 82세)씨를 만나 증언을 확보했다. 故 이인신씨는 강제 동원부터 밀리환초를 탈출할 때까지 3년여 간의 군속생활을 기록한 123쪽 분량의 수기를 2006년 진상규명위에 공개했다.

▲ 1943년 11월부터 1944년 2월까지 진행된 길버트 군도 및 마샬 군도 작전 기간, 미군 전폭기들이 항공모함 워싱턴 호와 렉싱턴 호를 호위 순찰하고 있다. /사진제공=NARA
▲ 1943년 11월부터 1944년 2월까지 진행된 길버트 군도 및 마샬 군도 작전 기간, 미군 전폭기들이 전함 워싱턴 호와 렉싱턴 호를 호위 순찰하고 있다. /사진제공=NARA

◇조선인의 증발과 식인증거

이인신씨의 수기에 따르면 1945년 2월 초 체르본섬에 있던 조선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본인을 따라간 동포 한 명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 감독관의 눈을 피해 몇 명씩 조를 짜 실종된 조선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 조선인의 행적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조선인 몇 명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체르본섬 인근 무인도에 갔다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실종된 조선인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허벅지살이 포를 뜬 것처럼 도려내져 있었다.

이들이 더욱 경악한 것은 며칠 전 일본인들이 선심을 쓰듯 건넨 '고래고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모처럼 먹는 고기 맛에 포만감을 느꼈지만 그 고기가 고래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전율에 휩싸였다. 아무런 장비도 없는 일본인이 고래를 잡아다 조선인에게 줄 리 없었던 것.

그리고 며칠 뒤 조선인 군속들이 잇달아 실종됐다. 그들 역시 포가 떠진 채 발견되자 조선인들은 밀려드는 공포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육(人肉)으로 주린 배를 채우다니….'

▲ 1945년 3월18일 남태평양 밀리환초에서 일본에 봉기를 일으킨 후 미군에 구조돼 구명보트로 이동 중인 조선인 징용자들이 안도하듯 웃음을 짓고 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NARA 소장
▲ 1945년 3월18일 남태평양 밀리환초에서 일본에 봉기를 일으킨 후 미군에 구조돼 구명보트로 이동 중인 조선인 징용자들이 안도하듯 웃음을 짓고 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NARA 소장

◇ 잡혀 먹히나, 굶어 죽으나…

“일본인에게 잡혀 먹히나, 굶어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조선인 군속 박종원씨 등 몇 명이 나섰다.

당시 밀리환초 체르본섬 주변은 미군 군함으로 완전히 포위돼 일본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긴 지 1년이 넘었다. 콩잎, 풀잎으로 죽을 쒀 먹으며 연명하던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섬을 탈출해야 했다. 섬 주변엔 미군 군함이 있어 일본인들만 없애면 구조를 요청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17일(*이인신씨는 2월28일로 기억했다. 미군에 구조된 날짜가 3월18일이므로 3월17일이 항거 날짜일 가능성이 높다) 밤 드디어 조선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일본인 7명을 죽이고 섬 탈출을 시도했다.

이인신씨는 자신의 수기에서 “3월1일, (새벽)날이 새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한국 동료 한 사람이 루코노루도의 의무반으로 찾아왔다. 나는 무슨 일로 날도 새지 않았는데 왔느냐고 물은즉 큰 일이 났단다. 우리 체르본섬에서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잡아다가 처치하는 사고가 발생해~(중략) 바다를 헤엄쳐 루코노루도 본부사무실로 보고하러 왔다면서 큰 좋은 일이나 한 것처럼 뻔뻔스럽게 말했다”고 당일 배신자의 고자질을 자신의 수기에 썼다.

이튿날 물이 빠지자, 한 시간 거리의 체르본섬에 기관총을 들고 간 일본군들은 굶주린 맹수처럼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손을 들고 항복한 조선인에게도 가차 없이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항거를 주동한 조선인 5, 6명은 서로 껴안고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자폭했다. 조선인 17명은 일본군에 생포돼 인근 루코노루도에 끌려가 다음 날 총살돼 구덩이에 파묻혔다. 섬의 원주민 15명도 피살당했다.

이인신씨는 수기에서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들은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기를 빌고 빌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자식이나 형제가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모르니 비통함을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한편 미군 측의 자료에는 “체르본섬 19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군의 노예생활에 반발하여 반란(revolt)을 일으켰으며, 68명의 생존자를 미 해군이 구조했다”고 적혀있다.

▲ 1945년 3월18일 미군에 의해 구조된 조선인 징용자들에 대한 기록물.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이 사진을 2014년 입수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NARA 소장
▲ 1945년 3월18일 미군에 의해 구조된 조선인 징용자들에 대한 기록물.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이 사진을 2014년 입수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NARA 소장

◇식인과 노예노동으로부터의 탈출

1945년 3월 밀리 환초에서 일어난 사건은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의 진상조사보고서(2010년)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인신씨의 증언은 반란사건 경험자인 박종원씨의 말을 옮긴 것이었다. 또한, '구해군군속신상조사표'에 나오는 사망자 분류 등을 토대로 저항 참여자 수를 추정했지만, 이것으로는 명확한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워서 사건의 실재를 증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밀리환초에서의 한국인 봉기가 실재했음을 명백히 밝혀주는 미국 문서와 한국인 노동자들이 반란 이후 탈출하여 1945년 3월18일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상황을 담은 사진자료 등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새롭게 발굴해 지난 2014년 8월에 공개했다.

이 자료에는 1945년 3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미군에 투항할 계획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 다음 날에 일본군 토벌대가 조선인 노동자들을 집단 학살했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미 국립문서관 5층에 있는 사진실에서 발견한 해군 사진 자료 11매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반란 이후 탈출하여 1945년 3월18일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상황을 담은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은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구조 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보여주고 있다.

사진 설명에는 19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군)의 노예생활에 반발하여 반란(revolt)을 일으켰으며, 68명의 생존자를 미 해군이 구조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이는 간접 증언 등을 토대로 알려져 있어 진위여부가 불확실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반란 사건이 실재하였음을 확인해주는 사진 기록이었다.

미군의 구조 사진에서 확인되듯이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동원으로 끌려와 당시 미군이 표현했던 것처럼, '노예노동자(slave laborers)' 상태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1946년 1월에 일본 우라가에 머물다 그 해 2월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김신호 기자 kimsh58@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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