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여,

이 세상 가장 순결한 꽃잎의 이름으로

저 하늘에 내 이름이 적히리니

그때에 이르기를 인생은 한마당 꿈이라 하라.

나는 사망의 검불이요

그 무덤을 덮는 한 촉의 풀잎이니

이제 뿌리째 들어내어

저 오뉴월 땡볕 아래 가차 없이 던지시라.

그리하여 마르고 마른 땅에

마른 줄거리같이 육신의 뼈가 놓일 때

아득하고 어두운 저 적소(謫所)위에

내 생도 사라지고 풀잎 또한 시든 것을.

그러나 아낌없는 세월이 또 흘러

어느 황량한 빈 벌판길에

목마른 황혼의 계절이 찾아오면

한 나그네 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그때에 거듭 이르기를 인생은 한마당 꿈이라 하라.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살아있는 이에게만 세상은 꿈이고 꽃이다. 죽음을 맞닥뜨린 이에게 세상은 '사망의 검불'이요, '무덤을 덮는 한 촉의 풀잎'이다. 박정만 시인은 80년대 한수산 필화사건에 휘말려 갖은 고문을 당하다 불혹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천재 시인이다. 희망이 없던 시대에 온몸으로 삶을 헤쳐 온 삶의 궤적처럼 그의 시들은 처연하고 애달프다. 그의 또 다른 시 '내 너에게 이르기를'에서, '꽃 지는 저녁은 바라보지 말라/ 눈부신 밤이 오면 눈물나리/ 노을이 무결처럼 지고/ 어떤 나그네가 죽자살자 걸어가는데/ 저녁때의 슬픔은 갖지 말라'고 노래했다. 우리 시사에서 이토록 처절하게 죽음을 노래한 시인은 찾기 어렵다.

그는 뜻하지 않게 불행한 일에 휘말려 삶이 헝클어지고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인생행로는 '한 마당 꿈'처럼 지나가 버렸다. 그는 죽음을 인지하고 나서 몇 달 동안 수백 편의 시를 미친 듯 쓰며 술로 정신의 아픔을 달랬다. 그것은 인생을 통달한 자의 예지의 노래였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저물녘 노을처럼 스러졌다. 그가 간 지 어언 삼십여 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 여전히 살아남아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애도한다.

탁월한 시인 기형도는 박정만 시인이 떠난 그 이듬해 갓 스물아홉의 나이로 요절했다.

기형도의 시 '비가2-붉은 달'에 이런 시구가 나온다.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누가 떠나든 죽든/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살아있는 이에게만 세상은 봄이고 희망이다.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