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총리나 인천교육감이 코로나가 미래교육을 10년 앞당겼다고 말할 때가 있다. 위기 국면을 기회로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는 이해하지만 그 미래를 어떻게 예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교육자들은 오늘과 미래를 구분하는 데서 논쟁을 벌여왔다. '청소년은 미래의 주역'이라는 표현이 선의로 가득하다해도 오늘 조역이 참고 기다렸다가 주역에 오르는 궤도를 문제 삼는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존재가 있을 수 없듯 미래에 잘 살기 위해 오늘을 견디는 교육은 이미 과거형이다.

미래는 과거에 반사해 본 빛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10년 후를 예상하려면 2011년, 2001년 즈음으로 눈을 돌려봐야 한다. 10년 전에 교육과학기술부는 '인재대국, 스마트교실 추진전략'을 내놓았다. 정보통신과 네트워크 자원을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4년 동안 2조원을 상회하는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디지털 교과서를 개발하고 IPTV를 교실에 보급하겠다고 했지만 전자교과서와 인터넷TV가 교육현장과 미래를 어떻게 이어왔는지 족적이 희미하다.

그 10년 전에는 모든 학교에 인터넷을 연결하고 통신비를 지원하겠다는 업무 계획이 있었다. 모든 교사와 교실에 PC를 한 대씩 보급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후속 계획에 따라 도입한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이 2002네이스 파동을 겪으며 학교 현장에 자리잡았다. '종이를 없애 효율을 높이고 업무를 획기적으로 경감하겠다'는 구상은 교무실을 '컴퓨터가 일을 시키는'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종이 대신 교사들끼리 대화가 사라졌고 업무량은 늘고 가용 시간이 줄었다.

다른 과거도 있다. 2001년 남한산초등학교는 폐교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으로부터 오늘의 교육을 혁신하기로 했다. 대안교육과 학교혁신을 아우르면서 우리 교육 변화를 불러 온 조용한 태풍의 눈을 만들어 냈다. 2009년에 경기교육감이 혁신학교로 이어받았고 10년 전부터는 전국으로 번져가며 학교를 변화하는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다. 미래를 앞당기는 게 아니라 현실을 쌓아올려 원하는 미래에 가 닿겠다는 시도들이다.

어떤 정책이든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지만 미래를 대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기술력보다 사람을 혁신해 온 길이 후자다. 기술력을 빼고 미래를 논할 수 없다면 미리 가 볼 수 있다. 승리호는 2092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폐기 우주선 쓰레기를 사냥하듯 수거해 생계를 잇는 '청소노동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입성도 꾀죄죄하지만 신발조차 없어 구멍 난 양말로 버틴다. 지구를 잃고 땅에 발 디딜 수 없이 떠다니는 '신발 없는 존재'들에게 미래는 디스토피아다. 아이를 위해 함께 희생하며 사람이 변하는 과정에서 유토피아 가능성이 열린다.

김초엽이 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170세 여성과학자 안나가 있다. 그는 슬렌포니아 행성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기 위해 100년째 기다리는 중이다. 딥프리징 기술로 냉동과 해동을 되풀이하며 버텨 왔다. 쇠락한 그 행성은 최신 우주 항법이 생기면서 노선마저 끊겼다. 그는 빛의 속도로 가더라도 수만 년이 걸리는 낡은 우주선을 타고 출항을 감행한다. “내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라면서. 첨단 미래 기술조차 가족에게 가는 길을 열어주지 못 한다면 그가 선택할 길은 그리움이 시키는 대로 떠나보는 것이다.

AI교육이 미래를 선점하는 길이라고 한다. AI를 학습시키기 위해 데이터를 분류 가공하는 '데이터 레이블링(Data Labelling)', 일명 '디지털 인형 눈알 붙이기'를 하는 노동자들은 오늘 월 평균 36만원을 벌고 있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어쩌면 미래는 오늘이 불안한 우리들이 만들어 낸 광채라서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미래의 형틀에 현재의 인간을 부어넣는'(채효정) 미래교육이라면 불길하다. 미래교육은 오늘교육을 앞서가는 가치가 될 수 없고 현재를 가리기 위해 동원할 수사는 더욱 아니다. 달나라에 먼저 가고 지구인에게 화성을 보여주던 동시간대 미국 텍사스 주민들은 땔감을 주우러 다녔다. 과연 누가, 무엇이 먼저인가?

 

/임병구 인천석남중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