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허대는 인천서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한 10리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모래섬이나 배를 타지 않고 해안선로만 걸어가게 된 풍치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와 달라서 막힘이 없다.” -<조광>, 1936년 9월호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년)이 쓴 '애상의 청춘일기'란 수필 중 일부이다. 삼국시대 백제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서로 왕래하던 능허대를 찾아 소회를 밝힌 글이다. 잔잔하게 그려내는 글솜씨가 엿보인다. 그는 중구 용동 출신으로, 인천이 낳은 미술사학의 태두로 유명하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해 미학·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졸업 후 1933년부터 10여년 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을 지냈다. 불과 28살에 관장을 맡았다.

우현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사뿐만 아니라 예술론과 미술비평 등 학문과 예술에 대한 폭 넓은 식견을 자랑했다. 그는 한국의 미를 '구수한 큰 맛'과 '무기교의 기교' 등으로 규정했다.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어도 100편이 넘는 글을 남길 정도로, 우리 미와 미술사 연구에 정열을 불태운 인물이다.

인천에선 우현을 기리는 활동도 잇따른다. 제일 먼저 새얼문화재단이 그 씨앗을 뿌렸다. 재단이 1992년에 만들어 기증한 우현 동상은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정원에 우뚝 서 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2006년 개관 60주년을 맞아 박물관 앞을 '우현마당'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아울러 인천문화재단은 우현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려고 '우현상'을 제정해 시상을 한다.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이었던 석남 이경성은 훗날 '한국 미술평론 개척'에 대해 우현의 지대한 영향을 회고하기도 했다.

인천 근·현대 예술가 삶을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인천시립송암미술관은 오는 31일부터 '송암예술아카데미'를 시작한다. 박물관·서예·회화 등 세 분야로 구성됐다. 박물관 분야에선 한국 박물관 기초를 놓은 우현과 석남의 삶을 살펴본다. 서예에선 20세기 국내 서예 최고봉인 검여 유희강과 동정 박세림의 삶을 살펴본다. 검여는 57세에 중풍에 걸려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자 왼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이름을 날렸다. 동정도 50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서예가로서 시대를 풍미했다. 회화에선 판화가 김상유와 서양화가 박영성의 삶을 그렸다. 김상유는 한국적인 소박한 삶과 정서를 잘 표현했고, 박영성은 수채화와 유화에 뛰어났다.

20세기를 불꽃처럼 살다 간 인천 예술인들의 삶. 앞으로 많은 예술가가 이들을 본받아 또다른 인천 예술의 이정표를 세웠으면 싶다. 인천은 개항 이후 문화·예술의 선구적 도시로서 국내 예술을 주도했던 도시이다.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각오와 포부를 기다린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