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문화원의 뿌리는 1950년대 초 미국이 자국의 문화를 알리고 계몽을 위한 상록수활동을 위해 공보원 산하에서 활동하던 공보관들이 자생적으로 만든 단체에서 시작됐다. 유엔관이나 공보관 등 다양한 명칭으로 활동하던 이들 단체는 1962년 결성된 사단법인 한국문화원연합회에 회원단체로 참여하면서 정부가 인정하는 기관으로 문화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정부의 보조금 지원과 시설 무상대여가 가능한 '지방문화사업조성법'과 시행령이 1965년 제정되면서 지역문화 거점으로 정착해 현재 전국 16개 시도연합회와 230개 지방문화원이 설립돼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한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올해로 연기됐던 김포문화원 제12대 원장을 오는 22일 임시총회를 통해 선출하게 됐다. 지난 12일 오후 5시 후보접수 마감시한까지 서류를 접수한 사람이 없어서다.

1964년 설립된 김포문화원은 57년이 넘는 역사만큼이나 부침도 적지 않았다. 1, 2대 원장을 끝으로 13년간(1971~1984)의 휴면기는 어렵게 탄생한 김포문화원의 첫 위기가 분명했다. 먹고 사는 게 문제였던 1960~70년대 결핍 상태에 이르던 문화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문화원의 기능이 1980년대 들어 다양하게 구축된 여러 통로가 대신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사회적 변화가 가져온 위기였다.

그러나 기대 속에 1984년 재설립돼 지난 37년을 달려온 김포문화원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재설립 후 지금까지 8명이 김포문화원 원장 직함을 갖거나 갖고 있지만 일부 원장의 잘못된 일탈로 김포문화원은 계륵 같은 존재가 되기도 했다. 사업결산과 총회 정족수 문제 등의 제기를 놓고 원장과 감사 간의 고소·고발로 사업추진을 위한 김포시의 보조금 지급이 중단되고 김포문화재단 설립의 단초가 됐다.

“김포만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드러나게 하겠다”고 약속한 원장은 취임 후 지방문화원 고유사업을 위한 향토사연구 폐쇄에 이어 학술대회 발표자료 표절 논란에 대한 사과 등으로 존경 대신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문화원장이라는 직책에 걸맞은 인격 겸비를 위한 자기성찰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문화원 설립 목표보다 사회적 기반을 견고히 하려는 인사들의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이 된 것도 인물난을 겪고 있는 지금의 김포문화원 현주소다. 새 원장 선출을 앞두고는 문화원 사무국 사정이 직원 수당은 물론 이사 등기비까지 내지 못할 정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포문화원의 위상은 다시 한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후보자들의 선거 기탁금으로 충당해야 할 처지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원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김포시의 사업비 보조금 지원도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와 김포문화원의 앞날은 밝지만은 않다.

지방문화원은 회원들과 지역문화 진흥을 위한 사업을 수행하는 지역문화의 거점이다. 따라서 지방문화원 수장은 누구보다 강직한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문화원장의 생각과 행동, 인격이 그 지역 주민들의 문화수준을 상징하는 지역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김포문화원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문화원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문화원 구성 주체들의 절대적인 자기 혁신뿐 아니라 사업예산을 지원하고 감독하는 김포시의 적극적인 역할도 중요하다. 김포문화원이 흩어진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고 최고 존경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길 고대해 본다.

 

/권용국 경기본사 사회2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