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회사는 온라인 직원대화방을 완전 익명제로 전환했다가 곤욕을 치뤘다. 인사_진급에 대한 불만, 동료_상사에 대한 인신공격, 타 부서와의 업무 갈등 등이 여과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음해성 정보가 사실처럼 퍼지면서 해당 직원이 피해를 입고, 조직 내부의 민감한 이슈를 폭로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대응하는 댓글 또한 거칠고 저급한 경우가 많아 분란의 요인이 되자 회사 측은 2년만에 실명제로 환원시켰다.

최근 신도시 땅 투기 문제가 불거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은 직장인 익명 게시판에 “우리는 부동산 투자하지 말라는 법 있으냐”, “투기 의혹이 제기된 땅은 누가 개발해도 개발될 곳이었다”라는 글들을 올렸다. 실명제였다면 수사 대상이 될 수도 있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부터 익명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은 엉망이 된지 오래다. 비난_욕설_혐오가 일상화된 댓글, 희한하고 저질스러운 조어(造語)는 기본이다. 익명성을 무기삼아 불확실한 정보를 퍼나르며, '아니면 말고' 식의 주장이 난무한다. 편향된 이념에 매몰된 확증편향자들이나 특정 정치세력과 연관된 댓글부대의 놀이터가 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사회여론을 형성하는 공론장'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포털운영자는 지나친 댓글은 삭제하는 등 자정 기능을 펴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등재된 글들을 보면 “걸러낸 게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악성 댓글은 너무 파괴적이어서 역기능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사람까지 잡는다. 악플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유명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하나둘이 아니다. 심각한 사안은 경찰이 IP 추적을 통해 수사를 펴지만 워낙 대상자가 많은 데다, 사이버 명예훼손은 처벌규정이 애매해 가해자 단죄가 쉽지 않다.

민주당 양기대 의원은 지난달 악성 댓글 피해 구제를 담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포털 게시판에 달린 악성 댓글로 중대한 피해를 입은 경우 포털사업자에게 게시판 운영중단 등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악플러들에게 배설 공간을 만들어준 포털사업자들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댓글 잠정중단과 같은 미봉책에 그칠 뿐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적이 더 무섭고,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적은 더 잔인해질 수 있는 법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 악의적인 감정과 허위정보를 멋대로 배설하는 것 만큼 비겁하고 추한 것은 없다. 고양이를 피해 다니는 생쥐처럼 사이트를 이동해가며 마우스로 더러운 글을 양산해내는 그들을 우리 사회 구성원이라 할 수 없다. '인터넷 실명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만큼 인터넷 공간이 오염돼 있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