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속에서 태어난 그들…지금도 축복받는 삶일까

2020년 3월14일.

"띠-." 전기음이 5평짜리 원룸에선 천둥 같아서 온종일 부여잡고 있던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머리 위 낡은 전등 소린지, 새로 산 소형 전기밥솥에서 나는 소린지 감도 안 잡히는 이 사소한 소음에 이민정(만 27세)씨는 주저앉아 울었다. '5평 원룸'과 적막 속 '전기음'은 평생 아빠와 엄마, 남동생과 함께 살던 집에선 모르던 것들이다. "취직한 서울 회사가 아침저녁으로 너무 멀어 자취하겠다"고 떼쓴 건 민정씨였다. 그가 나고 자란 인천 남동구에서 직장이 있는 서울 서초구까지 대중교통으로 어림잡아 왕복 세시간 이상이다. 조금 전 문 앞에서 자질구레한 가재도구가 든 봉투를 양손 가득 쥐어주며 "주말마다 와"라고 당부하고 간 엄마 뒷모습에 죄책감을 느끼던 참인데 "띠-" 전기음이 느닷없이 방 전체를 흔들고는 민정씨 가슴팍에 꽂혔다. 짐 내려주려고 온 아빠가 밥상도 없이 방바닥에서 먹고 간 치킨 상자도 눈에 밟혔다.

 

1986년 3월xx일.

기차가 역에서 출발했다. 새하얗게 눈 덮인 플랫폼에 서 있던 어머니는 점처럼 작아졌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이정수(만 56세)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나며 새긴 마지막 장면이다. 당시 정수씨가 보기에 탄광 말고는 강원도 산골에선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다. 졸업 후 겉돌 것을 염려한 가족들 성화로 큰 매형이 나섰다. "기술이라도 배우러 오라"며 매형이 소개해 준 자리는 인천 부평 공업단지 금형 일이었다. 회사에서 제공한 방 두 개 빌라에서 동년배 청년들이 6~7명씩 머물렀다. "잘살아 보겠다"는 각오로 상경(上京) 대신 상인(上仁)을 선택한 전국팔도 20대 초반 남성들이다. 정수씨는 이후 몇 년을 회사 숙소에서 머물다가 중매로 만난 여성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낳았다. 그중 장녀가 위에서 소개한 민정씨다. 정수씨는 요즘 사람 만날 때마다 "인천이 여느 시골처럼 한적한 동네도 아니고 일자리 문제 때문에 애지중지 키운 딸 상경시키고 따로 살 줄은 몰랐다"고 역정을 내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사람은 100살 넘게까지 사는 세상인데, 인천에서 꼭 나고 죽어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려는 게 아니다. 앞으로 연재될 '인천형 청년베이비부머 연구록' 기획은 인천과 연을 맺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개인 문제에 기인하기보다 도시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복기(復棋)이자 반성문이다. 극 중 화자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1991년부터 1995년생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인천형 청년베이비부머'라고 이름 붙이고 삶의 경로를 추적한다. '베이비부머'. 전쟁 후 또는 혹독한 불경기를 겪은 후 사회적·경제적 안정 속에서 태어난 세대를 지칭하며 국내에선 6·25전쟁 이후인 1955년부터 1963년까지를 일컫지만, 이번 기획에선 인천베이비붐 세대를 인천에서 태어난 1991년생(4만772명), 1992년생(4만2840명), 1993년생(4만1731명), 1994년생(4만1680명), 1995년생(4만1246명)생들로 규정한 것이다. '이주민의 도시'라는 꼬리표를 떼고 인천 역사상 한 해 출생아 수가 5년 연속 4만명을 넘어선 다시 못 올 인구 황금기다.(지난해 기준 인천지역 출생아 수는 1만6000명까지 추락했다.)

인천베이비부머 현재 나이는 올해로 만 26살부터 만 30살까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지역 고용과 소비, 출산 등 도시 유지를 위한 핵심 항목들을 관통하는 세대로 성장했다. 이들이 인천에서 태어난 우연하지만 필연적인 구조와 이들이 지금 인천에서 버티지 못하는 우연하지만 필연적인 구조의 복합적인 요소들을 되도록 자세하게 기획에서 짚어볼 계획이다.

/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kwj799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