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느 날, 어머니가 주신 집 한 채 들고 나와 그 집을 허물며 나는 산다. 집 한 채 다 허문 할아버지는 산으로 갔고, 그 집을 찾기 위해 할머니는 날마다 산으로 간다. 가슴에 여러 개 관솔 구멍이 뚫어진 집을 허물며 어머니는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홀로 걷는다. 이른 새벽이 되어야 나를 버린 나를 낳는 수도승처럼 강물은 어둠이 있어야 허물을 벗는 산과 다르다.

강물 속으로 산이 들어앉으면 산 속에 강물도 따라 들어앉는다. 그 산과 강물 사이에 집 한 채 허물며 나도 홀로 걷는다 아이들의 집도 귀퉁이가 조금 해지고 닳는다 조금씩 조금씩 내 집이 다 허물어지는 날에 아내도 홀로 집을 허물며 있겠다 그리고 소금꽃 피던 바다와 내가 벗어 놓은 그림자가 널려 있는 집터가 그리울 게다 아직 나에겐 결정되지 않은 사랑채 하나 남아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삶'에 대해 노래하는 것 같지만 심층적으로는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들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결핍된 존재이다. 모체(母體)와 분리되고 태반과 탯줄이 잘려나가고 몸속의 배설물들이 빠져나가는 등 결핍을 경험한다.

욕망은 그 결핍 때문에 발생한다. 욕망은 결핍을 낳고 그 욕망이 또 다른 결핍을 불러온다. 이렇듯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집'이다. '집'은 모든 사물들과 욕망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완성체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삶'은 나만의 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말을 바꾸면 '집'은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집을 허물며 산다”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집'은 채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허물어야 할 대상이다. 채우기 위한 삶은 두려움과 불안을 동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삶과 죽음이 밀착되어 있다는 시인의 존재론적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 역시 정신적 삶뿐만 아니라 물질적 소생에 걸쳐 모든 삶의 근원이 된다. 시인에게 죽음은 우울한 해체나 종말이 아니라, “나를 버린 나를 낳는 수도승처럼” “이른 새벽”에 또 다른 집을 만드는,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과 당혹감은 느끼는 것은 죽음을 '무(無)'로 인식하고 '무'로서의 죽음이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핍과 불안정함 그 자체를 인정하고, 헛된 욕망을 하나씩 하나씩 허무는 삶은 어떤가. 다시 채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비워야 한다. 그것이 어설픈 달관과 같은 허위의식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랑채' 하나쯤은 남겨 두면서…

/강동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