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환수요청 80필지 중
15필지만 소송 진행 중

친일파 432명 땅 추적했으나
168명 재산만 환수조치
일부는 친일파 후손에 돌려줘

이완용도 광복 전 대부분 팔아
2233만㎡ 중 1만928㎡만 귀속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친일 청산은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있다.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 이후 102년이 흘렀지만, 사회 곳곳에서의 친일 청산을 위한 노력은 더디기만 하다. 광복 후 제헌국회는 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간 자행된 친일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특별위원회를 만들었으나, 고작 14명만 처벌됐다.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고, 처벌받은 사람들도 금세 풀려났다.

문화와 역사 청산은 물론 눈에 보이는 재산상의 친일 청산도 아득하기만 하다. 정부는 친일후손을 상대로 재산환수소송을 벌이고 있지만 녹록지 않다. 친일잔재 청산에 관한 정부의 노력이 공전을 거듭하면서, 지식인의 탈을 쓴 일부가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악랄한 왜곡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지 답답하다.

김호동 광복회 안양시지회장은 “존중받아야 할 독립유공자는 조롱의 대상으로, 친일파 후손은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삶을 누린다”며 “친일행위를 청산해야만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민족이 일어난 3·1 운동도 벌써 102년이 흘렀으나, 민족을 배신한 친일인사가 얻었던 이익을 환수하는 소송은 미완으로 남아있다.

25일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에 따르면 여주지원은 지난해 8월 법무부가 친일인사 임선준 후손을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에서 법무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소송으로 법무부는 임선준이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행위로 얻은 재산을 반환받았다.

임선준은 1908년 탁지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일본 소유의 군 용지·철도용지 등을 면세하고 의병에게 처단된 자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의 공로로 일본 자작 작위에 임명됐고, 은사공채(일제가 조선 강제점거에 협력한 관료들에게 일종의 포상금으로 지급한 공채) 5만원을 받았다.

지난 2019년 7월 광복회는 숨겨진 친일재산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결과로 같은 해 9월 임선준이 얻는 토지를 비롯해 친일파 6명의 후손 소유 친일재산 80필지 면적 16만7142㎡, 공시지가 18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법무부에 환수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80필지에 대한 환수는 더딘 상태다.

법무부는 광복회의 환수요청 이후 9개월여가 넘는 자료 조사와 법리 검토를 통해 전체 요청 부동산 중 15필지(18.75%) 2만여㎡ 공시지가 22억원 상당의 부동산만이 특별법에서 정한 환수 요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65건에 대해서는 추가 검토를 통해 소송을 제기한다는 계획이나, 현재 15필지에 대한 소송 중 임씨에 대한 소송만 마무리된 상태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시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취득한 재산을 환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했다고 본 것이다.

다만, 이후 수차례에 걸쳐 재산 명의를 변경한 경우 유증·증여받은 자가 친일재산임을 안 경우만 환수할 수 있다.

친일재산을 취득한 후 이를 처분한 이익을 환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여기에 특별법에 따라 운영된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환수조치도 미완으로 남아있다.

대통령직속기구로 지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4년간 활동한 친일재산조사위는 친일파 432명의 가계도를 일일이 그려 가족관계를 확인해 땅을 추적했다. 이 중 168명의 재산을 환수조치 했다.

환수조치가 된 재산은 부동산 2457필지 1300만9403㎡ 규모로 공시지가 1267억원 어치다. 이마저도 124회에 걸친 친일파 후손과 국가 간 소송이 제기됐다. 소송결과 국가는 총 114건의 소송에서 이겼지만, 211만3337㎡의 부동산은 친일파 후손 측에게 돌려줬다.

이런 환수가 미완으로 남은 이유는 땅을 제3자에게 팔았거나 재산을 탕진한 경우 환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을사오적'의 대표적인 이완용은 수원시 팔달구의 1.7배에 달하는 2233만4954㎡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광복 전 대부분을 팔아 현금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위가 환수 조치한 이완용의 땅은 1만928㎡에 불과했다.


 


 

내가 사는 곳 옆이 '친일파 후손 땅'? … 대부분 알지 못해

▲ 의정부시 호원동 한 학교 옥상에서 친일파 이해승 후손의 땅이 보이고 있다. /김중래 기자 jlcomet@incheonilbo.com
▲ 의정부시 호원동 한 학교 옥상에서 친일파 이해승 후손의 땅이 보이고 있다. /김중래 기자 jlcomet@incheonilbo.com

정부가 환수하지 못한 친일파 후손의 재산이 한국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다.

25일 의정부시 호원동 수도권 제1 순환고속도로 옆에는 도로를 나란히 지나는 호원고가가 있다. 이 호원고가 양옆에는 낮은 언덕이 있고, 고속도로 반대편 언덕 너머에는 주거지와 학교가 있다.

주거지에는 신축빌라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 임야의 소유주는 친일파 이해승의 증손자다.

이해승은 1890년 태어난 조선의 왕족이다. 1910년 6월에는 청풍군(淸豊君)에 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점거한 1910년 8월 29일 이후 친일의 길을 걷는다. 그는 조선 귀족을 대표해 일본에 가서 메이지 덴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묘소에 참배했다.

일제는 이해승에게 후작 작위와 함께 은사공채 16만2000원(현시가 약 30~40억원)을 줬다. 이는 을사오적인 이완용(15만원), 박제순(10만원), 이지용(10만원), 이근택(5만2500원), 권중현(5만원)보다 많다. 다만 이완용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등의 대가로 10만원을 더 받은 바 있다.

임야는 총 1만4666㎡면적 5필지로 나뉘어있다. 지난해 공시지가 기준 재산 가치는 7억6357만원 상당이다.임야 중 1개 필지는 학교와 바로 맞닿아 있다. 산을 깍아 만든 학교는 지금도 운동장 한편으로 친일파 후손의 땅이 보이지만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학교가 기존 산을 깎아 만들었는데, 아마도 같은 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광복회가 지난 2019년 해당 임야를 발견해 환수요청을 해 국가와 친일파 후손 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이 진행 중이다.

 

/김중래 기자 jlcomet@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