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무렵 노동부 출입기자들이 해외 취재를 갈 일은 하나 뿐이었다. 격년제로 열리던 국제기능올림픽이다. 1989년 8월 영국 버밍엄에서 제30회 국제기능올림픽이 열렸다. 한국은 그 직전 대회까지 7연패를 거듭한 세계 기능 강국이었다. 국민들은 이번에도 당연히 종합우승이려니 하던 시절이다. 마지막 시상일 날, 과연 우리 선수들이 잇따라 시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8연패였다. 대부분 10대 후반인 앳된 모습의 우리 선수들은 저마다 눈물을 글썽였다. 그간 그들이 치렀을 각고의 노력들을 생각하니 지켜보는 이의 눈시울도 따라서 뜨거워졌다.

▶나라 전체가 가난하던 시절,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술 하나만 있으면 밥 굶지 않는다.” 요즘 잣대로 하면 기술이 아니라 기능일 것이다. 그래서 상급학교 진학이 언감생심이던 소년 소녀들은 기술 현장으로 나갔다. 철공소, 양복점, 양장점, 미장원…. 1967년 한국이 기능올림픽에 첫 출전해 딴 금메달도 양복, 제화 부문이었다. 당시 라디오 양복점 광고에 기능올림픽 시상식 실황이 방송된 연유다. '우리도 잘 살아보자'며 산업화에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이처럼 필수 기능 인력이 너무 없었다. 1968년 ILO(국제노동기구)의 자금지원을 받아 인천에 국립중앙직업훈련원이 세워졌다. 한국의 첫 국립직업학교다. 1972년에는 독일 차관을 재원으로 한독직업훈련원(부산)이, 이듬해에는 서울 용산에 정수직업훈련원이 문을 열었다. 이후 전국 곳곳에 직업훈련원이 잇따라 세워졌다. '기술보국(技術報國)'의 전사들을 키워내는 곳이었다. 이제는 국책특수대학으로 거듭난 한국폴리텍대학(인천시 부평구)이 전국 38곳에 캠퍼스를 두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먹고 살만 해지니 다시 기술 천시로 돌아갔다. 저마다 내 아이들 만큼은 원없이 공부시키겠다는 빗나간 교육열에서다. 그런데 다시 기술입신(技術立身)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다. 취업절벽을 넘어 취업포기 시대를 맞아서다. 한 후배는 고교를 졸업한 아들이 바로 항공정비 직업학교로 직행했다고 한다. 대학을 나와서도 일자리가 없었던 친구 아들은 폴리텍대학에서 용접 기술을 배웠다. 덕분에 지난 봄 코로나 와중에서도 결혼식까지 올렸다.

▶지난 주 전국의 폴리텍대학 캠퍼스에서 1만1387명의 기술인들이 배출됐다고 한다. 예전처럼 용접, 선반, 밀링 기술들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AI, IT, 바이오 등 하이테크 과정에다 융합기술 과정까지 있다. 인천캠퍼스 스마트팩토리과의 취업률은 95%에 이른다. 이 대학에는 'U턴 비율'이라는 용어가 있다. 다른 대학을 마쳤거나 재학 중 폴리텍대학에 들어오는 비율이다. 이 비율이 거의 60% 수준에 이른다. 인천에서 첫 둥지를 튼 폴리텍대학에서 더 많은 청년들이 땀을 흘렸으면 좋겠다. 이야말로 프래그마티즘, 실사구시 정신의 전당 아닌가.

 

/정기환 논설실장 chung783@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