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념 후보는 1940년 전북 부안 줄포에서 진소홍(陳銷洪)씨의 6남매 중 네째로 태어났다. 형제 중에서 유독 키가 작았던 진념 후보였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강당에서 떨어져 입원할 정도로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진 후보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가난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새우어장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이 날로 번창해 꽤 유복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념 후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가세는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져 버렸다. 아버지는 하와이, 중국 등으로 새우를 말려 수출을 했는데, 중학교 입학에서 졸업할 때까지의 3년동안 새우를 말려야 할 철에 꼭 비가 쏟아졌다. 냉동고가 없던 그 시절에 3년을 내리 망쳐 집안이 기울대로 기울어버린 것이다. 진념 후보 인생에서 첫 번째 시련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진 후보는 전주고 1학년 때부터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간 날보다 못 싸 가지고 간 날이 더 많게 된다. 그때의 가난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지, 전교 상위권을 다투던 진념 후보의 성적은 고교 1학년 때 150등까지 추락해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진 후보는 자신의 키가 안 자란 것도 당시 영양상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 상대를 입학하고서도 어려웠긴 마찬가지였다. 4년동안 하숙을 했던 경험은 채 몇 달이 못 되었다. 배고픈 설움은 배를 곯아 본 사람만이 안다고 한다. 그래서 최소한 우리나라에 배곯는 사람만은 없도록 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 다짐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선택하고 지금까지 경제전문가로 외길을 걸을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진 후보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경제학자인 에르하르트에 깊이 빠져든다. 그는 1949년에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되자 아데나워 내각의 연방경제장관에 취임한 경제학자이자 관료이다. 한국의 에르하르트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고등고시를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때 그에게 두 번째 큰 시련이 닥쳐오는데, 그것이 바로 군대 문제였다.
 진념 후보는 대학 3학년 때부터 ROTC 1기였는데, 결국 임관을 하지 못했다. 1961년 수색에 가서 임관을 위한 훈련까지 받았건만 연좌제 때문에 결국 임관이 좌절되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소식이 끊겨버린 큰 형님 때문이었다. 남자로 태어나서 더군다나 장교 교육까지 받은 내가 군대를 갈 수 없다는 좌절감을 공부에 매진하면서 풀어 갔다. 그런 노력으로 인해 결국 그는 고등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하는 영광을 얻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정찬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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