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A 선물에 일어난 '자중지란' 항만업계 손잡고 풀어내다


1948년 12월10일 한미경제협정 체결 통해
부흥 기술·물자 지원 담당할 경제협조처 창설

이듬해 2월16일 밀 10만석 첫 원조 인천항 도착
월평균 5~6만t 입하…부두노동자 1만명 넘어
하역회사 난립…정부 경험 부족 혼란 '부채질'

인천항만하역협회 6월29일 창설…상황 수습
전년도 18개 달하던 군소업체도 7개로 통합
원가계산심사위서 업체별 노임 문제 조정

미군정 기간 황폐했던 갑문 11월 설치 마무리
언론, 선박 운항 정상화로 해운 입국 매진 촉구'
▲ ECA에 의한 원조가 시작되면서 인천항에 속속 입항하던 무역선. 도크 정비의 불충분으로 외항에 정박 중인 경우가 많았다. /사진출처=인천사진대관

미군정 하의 인천항이 '빈사의 백조' 형국이었다고는 해도, 미군 물자의 하역으로 6000여 노동자들이 생계를 이을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 실제 예를 1946년 인천항에서 소화한 하역 물량에서 볼 수 있다. 그해 국내 각지와의 이출(移出) 총량이 9만5845t인데 비해 해외 수입이라고 할 미군의 민수품 입하량은 곡물, 석탄, 석유, 시멘트 등을 합쳐 12만7083t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인천항은 향후에도 꾸준한 하역물량을 보장받을 수 있는 호기회를 맞게 되었으니, 경제협조처(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ECA)의 탄생이 그것이었다. ECA는 마셜플랜(Marshall Plan)에 의해 미국이 유럽 경제를 지원하던 기구였는데, 1948년 8월15일 정부가 수립되고 이어 12월10일에 한미경제협정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창설되었던 것이다.

ECA는 단순한 구호물자의 제공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 부흥을 위해 기술과 물자를 원조하는 기구로서 1949년 1월1일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2월16일에 최초의 원조물자인 소맥(小麥) 10만 석(石)을 인천항을 통해 들여온 것이다. 이렇게 미국의 원조가 시작됨으로써 인천항은 활기를 띨 수 있었던 것이다.

“부두의 하역 근로자들에게 배포되는 노임만도 월 1억 원을 넘었으니 인천 하역업계는 한때 인천 경제를 주름잡아 온 무시 못할 업계였다.”는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의 기록이 그 같은 인천항의 상황을 증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문제점도 있었으니, 그것을 또한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1949년 2월16일, 소맥(小麥) 1만 석(石)을 싣고 인천항에 입항한 선박 '아메리칸 메일'호에 대해 'ECA의 첫 선물'이라고 표현한 자유신문 기사이다. 한미경제협정에 의해 탄생한 ECA의 한국 원조는 이렇게 인천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사진출처=인천사진대관
▲ 1949년 2월16일, 소맥(小麥) 1만 석(石)을 싣고 인천항에 입항한 선박 '아메리칸 메일'호에 대해 'ECA의 첫 선물'이라고 표현한 자유신문 기사이다. 한미경제협정에 의해 탄생한 ECA의 한국 원조는 이렇게 인천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사진출처=인천사진대관

ECA 물자가 처음으로 인천항에 들어온 것은 우리 정부가 수립된 다음 해인 1949년 2월 16일이었다. 그 후에도 ECA 물자는 계속 들어왔는데 <중략> 이처럼 원조 물자의 인천항 입하량은 날이 갈수록 늘어 월평균 5~6만 톤에 달했고 이에 종사하는 부두근로자의 수도 1만 명을 상회하였다. 그러나 인천항 물동량의 증가는 군소 하역업자의 난립을 초래하게 되어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외자 하역을 관리하고 있던 미군 당국은 소운송의 면허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았고 원조 물자가 입항할 때마다 수시로 업자들과 계약을 체결했던 탓에 업계의 난립상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 1949년 2월17일, 당시 인천항 월미도 외항에 정박한 '아메리칸 메일'호 선상에서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와 번스 ECA한국국장이 인수증 서명식을 가지고 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9년 2월17일, 당시 인천항 월미도 외항에 정박한 '아메리칸 메일'호 선상에서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와 번스 ECA한국국장이 인수증 서명식을 가지고 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내용을 보면 ECA 출범 이후, 하역 물량이 월평균 5만t을 넘어서면서 인천항 부두노동자도 어느새 1만명을 상회하고 있고, 이 같은 호경기의 '파이'를 서로 차지하려는 인천항 하역업계의 난립과 무질서를 문제로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보자.

최근 원조물자의 도입이 본격화함에 따라 이 하역작업을 대행하려고 부산, 인천에는 하역회사가 우후죽순 격으로 범람 속출되고 잇는 경향이 있어 하역 도중의 손실과 하역비가 국민에 대한 원조물자의 공급 가격에 다대한 영향을 초래할 뿐 아니라 원조물자의 적절한 사용 여하의 문제에도 관련되는 중요한 사항임에 비추어 외자총국(外資總局)에서는 하역회사의 정선주의(精選主義)를 견지하여 하역회사 자본, 조직, 시설, 기술을 충분히 검토한 후 엄격히 선택한 소수 유능 회사에 대행시키고 있으며 앞으로 합동 기타에 의한 일층의 강화 육성을 도모할 계획이라고 한다.

1949년 3월29일자 연합신문도 인천항 하역업체의 난립이 가져오는 여러 가지 폐해를 지적하면서, 외자총국의 대응 방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무질서는 민간 하역업체들뿐만이 아니었다. 하역을 지시하고 감독하는 관청도 마찬가지였음을 조선중앙일보는 2월 8, 9일 인천항에 입항한 비료 하역 사례를 들어 지적한다.

내용인즉 인천항만청은 동기공사(東起公司)를, 외자총국은 자유노조(自由勞組)를 지정하는가 하면, 특히 조선농회(朝鮮農會)의 비료와 식량공사(食糧公社)의 양곡 하역에 있어서는 하주 격인 두 기구까지, 모두 네 군데로부터 지시와 감독을 받아야 하는 까닭에 하역회사와 노동자들 모두가 갈팡질팡하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

▲ 또 다른 신문 조선중앙일보 1949년 5월12일자는 인천항 하역 군소 업자가 3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난립함에 따라 지나친 작업 쟁탈을 막기 위해 통합을 유도하고 있으나 외자총국에서는 오히려 통합 조치에서 이탈한 군소 업자에게 하역을 위탁하는 사례가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또 다른 신문 조선중앙일보 1949년 5월12일자는 인천항 하역 군소 업자가 3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난립함에 따라 지나친 작업 쟁탈을 막기 위해 통합을 유도하고 있으나 외자총국에서는 오히려 통합 조치에서 이탈한 군소 업자에게 하역을 위탁하는 사례가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이러한 난맥상은 정부가 출범한지 불과 몇 개월 되지 않아 생긴 불안정과 국가경영에 관한 지식·경험의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돈과 자원의 빈곤은 더 큰 요인이었다.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1949년 1월22일 '대한노총인천항만연맹(大韓勞總仁川港灣聯盟)이 대통령, 국무총리, 각 장관에게 낸 7만 5천불 지급 진정' 내용을 보면 당시 우리 정부가 얼마나 자금이 절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 돈은 미국정부가 '자기들 원조물자의 하역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인천과 부산 등지의 3만여 노동자들에게 작업찬양금(作業讚揚金)으로 지급하기 위해 외자총국에 기탁했던 것'인데, 정부는 일언반구 꿀 먹은 벙어리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역회사의 난립과 무질서는 1949년 6월29일 업체 간 유대 강화와 이를 통해 인천항 경기 부양을 목적으로 인천항만하역협회(仁川港灣荷役協會)가 창설되면서 일단 정리의 길을 걷는다.

더불어 작업권 쟁탈을 위해 벌어지던 업자 간 반목, 분규와 이로 인한 작업 지연을 막고 사고를 방지하는 한편, 장비 현대화를 촉구하는 해운당국과 외자총국의 방침에 따라 군소업체 간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1948년 총 18개에 달했던 군소 하역회사는 1949년에는 7개 업체로 통합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다.

▲ 인천노총항만연맹에서 정부를 상대로 미국 정부가 제공한 부두노동자 작업찬양금(作業讚揚金)의 조속한 처분을 대통령, 국무총리, 각 장관에게 진정했다는 1949년 11월24일자 한성일보의 보도 내용./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인천노총항만연맹에서 정부를 상대로 미국 정부가 제공한 부두노동자 작업찬양금(作業讚揚金)의 조속한 처분을 대통령, 국무총리, 각 장관에게 진정했다는 1949년 11월24일자 한성일보의 보도 내용./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인천 강화 출신 조봉암(曺奉岩) 당시 농림장관이 인천항에 입항한 비료 하역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6백여명의 작업자들을 격려했다는 1948년 12월12일자 평화일보 기사. 당시 비료를 하역했던 제일항만작업사(第一港灣作業社)의 주연길(朱連吉) 사장은 인천항 하역업계 원로의 한 사람이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인천 강화 출신 조봉암(曺奉岩) 당시 농림장관이 인천항에 입항한 비료 하역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6백여명의 작업자들을 격려했다는 1948년 12월12일자 평화일보 기사. 당시 비료를 하역했던 제일항만작업사(第一港灣作業社)의 주연길(朱連吉) 사장은 인천항 하역업계 원로의 한 사람이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그밖에도 업체별로 구구하던 인천항 하역 노임 문제도 원가계산심사위원회를 통해 조정하게 된다. 더불어 미군정 기간 정비 없이 황폐했던 인천항 갑문 역시 9월부터 11월에 걸쳐 설치를 마친다.

한편, 인천항 재건과 선박 수리 등, 적극적인 해양 인천을 염원하는 각성과 질책도 이어진다. 특히 인천항 소재 200여 척의 선박에 대한 수리설비의 미비와 자재 부족으로 운행 가능한 선박은 고작 40~50척밖에 안 되는 현실을 질타하는 조선중앙일보의 논조는 자못 준열하다. 위정자들에게 하역 활황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인천항의 지정학적 위치를 헤아려 하루 빨리 선박 운항을 정상화해 “바다로, 바다로” 나감으로써 국제무역을 통한 해운 입국에 매진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1949년 6월29일, 3년 11개월의 한국 주둔을 끝내고 인천항에서 마지막 미군부대가 출항한다. 7월1일자 동광신문은 “미군이 첫 상륙한 것도 인천이요, 4년간 한국 건설에 이바지하고 그리운 자기들의 고국을 찾아 마지막 길을 놓게 된 것도 이 인천항이다. 참으로 항도 인천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역사적 큰 지점이요, 조국 해방의 공로자 미군들을 바라고 있었다.”라는 감상적인 기사를 내보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