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수험생들이 서울대 수시에 181명 합격하여 6대 광역시 중 26.5%를 차지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런 성과는 분명히 인천교육의 자랑으로 기사로 다룰 만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불편하다. 아직도 언론은 서울대 합격생 실적으로 교육의 성과를 평가하는가?

예전에 졸업 시즌이 되면 학교마다 펼침막을 커다랗게 만들어 교문에 내걸었다. 거기에는 이른바 명문대에 합격한 학생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런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이나 아무 대학도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은 마치 죄인처럼 그 펼침막 아래를 피해 지나다녀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간지에는 명문대 합격생 숫자로 전국의 고등학교 순위를 매겨 보도했다. 그 시절 명문대 합격생 수는 고등학교의 교육 성과를 평가하는 유일무이의 잣대였다. 학교가 이루어낸 다른 많은 성과는 여기에 묻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는 오로지 명문대에 학생들을 합격시키는 일에만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을 반성하고 이제 학교에서는 그런 펼침막을 내걸지 않는다. 언론도 이와 같은 순위 매기기는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 전반에 명문대 합격 지상주의의 잔재가 어른거리고 있어 안타깝다. 명문대 합격이 칭찬받을 일이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명문대 합격 지상주의는 또 다른 문제다. 이러한 태도가 사회 전반을 지배한다면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과 양극화 사회로 계속 치달을 것이다.

서울대 수시에 합격한 181명이라는 숫자는 인천의 2020학년도 고등학교 졸업생 2만3000여명의 0.8%밖에 안된다. 나머지 99%의 학생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왜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그들이 결국 이 사회의 대다수가 될 터인데 왜 극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는가? 1등만 대우받는 사회는 불행하다. 너, 나, 우리가 대부분 이 99%에 속한다. 그런데 1%가 되지 못했다고 모두 실패자로 취급당하는 사회를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회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맨해튼에 명문 유치원 열풍이 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국은 참 한국과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국은 미국을 정말 열심히 배웠으며, 미국보다 훨씬 미국적인 교육을 했다. 한국교육의 정책은 대부분 미국발이었다.

미국교육의 영향이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미국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곳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신의 온상이라는 점이다. 세계화 시대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재편하고 미국은 자국(정확히 말하면 자본권력)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추진하였다. 미국교육은 이러한 국가적 요구에 따라 교육과정을 구성하였다. 그러므로 미국교육에는 언제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한국교육은 이러한 미국교육의 영향에다가 설상가상으로 한국사회의 특수한 입신양명의 교육열까지 얹어 그 그림자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한국의 학교 교육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학생들의 진로진학 목표는 명문 대학 합격이나 돈 잘 버는 직업이 되었다. 나라의 기둥이 될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 진학에 목을 매곤 한다. 이 공동체에 어떻게 이바지할지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승자를 위한 교육이다. 1등이나 최고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위해 남을 짓누르고 이기는 법을 가르친다. 경쟁으로 치닫는 기성 사회의 논리가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수된다. 명문대, 혹은 의대에 가는 소수 성적 최상위 학생들 외에 나머지 대다수 학생은 주요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들이 무슨 꿈을 꾸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성공한 1%에만 주목할 때 나머지 99%는 패배감과 좌절을 맛본다. 명문대에 몇 명을 합격시켰느냐 하는 잣대로 고등학교의 교육 역량을 평가하는 데서 이제는 벗어나자.

 

/한승희 전 검단고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