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리(猾吏), 장리(臟吏), 색리(色吏), 탐관오리(貪官汚吏), 시랑(豺狼) 등은 청백리나 염리(廉吏)에 반대되는 부패공무원을 지칭하는 단어이고 그들의 행태는 향간호우(鄕奸豪右), 번작(反作), 침어(侵漁), 가렴주구(苛斂誅求) 등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힘없는 백성에게는 가혹하고 권세있는 집안이나 가진 자에게는 아첨하며 횡포를 일삼는 지방관리를 단죄하기 위해 불시미복으로 파견되는 암행어사가 기록에 나타난 것은 1479년 성종 10년의 일이다.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는 쥐가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며 암행어사가 한번 나간다면 탐관이 저절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암행어사는 문관으로 공명하고 강명한 자, 지방행정에 경험이 있는 자 중 임금이 직접 선택하거나 3정승이 추천해 추생분견이라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하였다. 지방의 이름을 적은 댓가지를 통에 넣고 점괘를 보듯 무작위로 뽑아 파견하는 방식이다.

암행어사로 낙점되면 마패와 놋쇠 자로 만들어진 유척(鍮尺 2개, 파견될 지역을 기재한 임명장인 봉서(封書)와 어사의 직무를 적은 팔도어사재거사목(事目)을 받았다. 봉서는 남대문이나 동대문 밖에 나가서야 열어봐야 했다.

유척은 두 개인데 한 개는 군포, 됫박 등 도량형이 규격에 맞는지 확인하는 표준 도량형기구이고 하나는 검시나 형기구등의 수치를 재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사목에는 암행어사가 염찰(廉察)하고 단죄해야 할 부분을 명기하고 이렇게 조치하라는 식의 구체적인 직무행동지침이다. 한잡(閑雜)한 무리들을 다수 데리고 가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없이는 연로(沿路) 고을의 일은 참견하지 말라는 내용도 있다. 암행어사는 고을수령과 같은 6품(5급 정도)이었지만 3품 이하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다. 암행어사에 임명되면 아전 2~3명을 대동하고 봉서를 뜯은 즉시 출발해야 했다.

이런 암행어사를 대하는 부패한 관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을 것이다. 불시파견이 원칙이고 남루한 복장이겠지만 어찌어찌 어사 파견 사실을 알아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거나 관아를 비우고 줄행랑을 놓고 군졸을 풀어 어사를 잡아가두기도 하였다. 지방수령이 같은 당파의 일원이라면 눈감아 주기도 하고 회유나 보복을 하기도 하였다.

정약용, 김정희도 암행어사 출신인데 처벌한 관리들의 미움을 사 정치보복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어사가 사목에 적힌 임무를 마냥 수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어 달 정도의 기한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임금에게 서계(書啓)라고 하여 일종의 임무수행결과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에 별단(別單)이라 하여 임의로 제출하는 것이 있었는데 어사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 개선 점, 그리고 정치적 식견 등을 담은 어사의 철학이었다. 많은 임금들이 이런 어사의 별단을 읽고 인재를 키우지 않았겠는가. 어사는 지방관원의 잘못만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었다. 초야에 묻혀있으되 박식독행의 선비를 발굴하고 어려운 백성을 찾는 임무도 주어졌다.

지금도 각 기관마다 암행어사격인 공직감찰 부서가 존재한다. 부패한 공무원을 찾아 죄를 묻는 일은 잘 하겠지만 예전의 암행어사가 하듯 초야에 묻힌 선비나 효열(孝烈)과 절의(節義)가 특이하거나 어려운 사정의 사람들을 찾는 따뜻한 일도 병행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최계철 인천공인행정사합동사무소 대표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