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미군정이 독점…'온전한 우리 것' 희망도 다가오다

'인천항, 죽음위험 앞둔 백조'신문 묘사
인천항무청에서 조선인이 운영하나
미군정 사용권 독점 조선인 선박 금지

미군정, 부족한 민간 물자 원조에 맡겨
인천항 무역 정상화·생산 후순위 영향

1947년 제일한양호 대중무역 첫 발
1947년 첫 외국 무역선 피리어드 입항
중국행 우편물 -광물 미국 수출도 시작
순 우리선박 앵도호, 1948년 홍콩 출항

1947년 군산·목포·여수·부산행 시운전
1948년 인천-옹진·군산 항로 시작

1948년 인천항>부산항 수출입 압도
인천항 6억여원·부산항 1억여원

1948년말 인천항 미군과 반반 사용키로
▲ 하늘에서 본 인천시가 사진이다. 아직 제2도크가 건설되기 전의 풍경이다. 광복 후 인천항 도크는 미군 단독으로 사용하는 항만으로 한국 선박은 출입할 수 없었다./사진 출처 =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 하늘에서 본 인천시가 사진이다. 아직 제2도크가 건설되기 전의 풍경이다. 광복 후 인천항 도크는 미군 단독으로 사용하는 항만으로 한국 선박은 출입할 수 없었다./사진 출처 =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1947년 1월, 중외경제신문의 한 특파(特派) 기자는 인천항 선거(船渠)를 둘러본 감회로 '빈사의 백조'라는 제하(題下)의 기사를 쓴다. 표현인즉 “양쪽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얄궂은 작란(作亂) 꾸러기의 악희(惡_)에 의하여 날개털이 뽑히어 죽음의 위험을 바라보고 있는 백조(白鳥)를 보는 것과 같은 애통함을 금치 못하는 바”이라는 것이다.

혹 인천항의 흰 갈매기를 상징화한 것인지 모르나, 국도(國都) 서울과의 인접한 지리적 위치와 함께 도크 시설을 보유함으로써 양항(良港)의 조건을 갖춘 인천항이 “해방 후 금일에는 동갑부(同閘埠)의 유지(維持) 급(及) 운영은 인천항무청(仁川港務廳)에서 조선인 손으로 하고 있으나 사용권은 오직 미군 당국만 가지고 있어 조선인 소유 선박은 현재 이 부두에 절대로 출입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지난 번 글에서, 광복은 맞았으나 인천항은 아직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였다.

미군정이 이렇게 인천항을 독점한 것은 그들이 한국 내에서 펼친 경제정책 목표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사관논총』 제84호, 김점숙의 「1948~53년 시기, 대한민국 정부의 무역정책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즉, 당시 미군정은 한국에 대한 정책 목표를 “민생 안정과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는 정도”에 두고 “부족한 민간의 필수 보급물자는 생산의 장려를 통해서가 아니라 원조물자의 도입을 통해서 충당”하려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이 논문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애초 미군정은 공장 등 제조 시설의 본격 가동과 인천항을 이용한 인천항 무역 정상화를 한국정부 수립 이후로 미루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인천항을 운영하는 데 있어 미군정은 자기들의 필요 물자와, 필수적인 대한(對韓) 원조물자의 도입 정책 목표에 따른 '미군정 무역'만을 수행했던 것이니, 한국인 선박은 절대로 출입할 수 없는 인천항 선거(船渠)를 '빈사의 백조' 상태로 놓아두었으리라는 이야기다.

실제 1947년 3월 14일자 공업신문 기사를 보면, 인천항 선거의 한국 선박 사용 허가에 대한 한국 기자단의 질문에 군정청 러치 군정장관은 확답을 피하며 바로 앞서 논문 내용과 일치하는 언급을 한다. 즉 “군정청에서는 조선 경제 재건에 필요한 물자를 수입하고 있는, 민간 물자 배급 계획에 사용하기 위하여”라는 것이었다.

▲ 소형 선박으로 도크 밖 해상에서 물자를 하역하는 광경. 1947년 3월14일 공업신문은 ‘도크에 입항할 수 없는 한국 선박은 도크로부터 8해리(海里) 밖 해상에서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하양(下揚)하는 형편’이라고 쓰고 있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소형 선박으로 도크 밖 해상에서 물자를 하역하는 광경. 1947년 3월14일 공업신문은 ‘도크에 입항할 수 없는 한국 선박은 도크로부터 8해리(海里) 밖 해상에서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하양(下揚)하는 형편’이라고 쓰고 있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광복 이후, 도하 신문들이 중국인에 의해 인천항 외항에서 자행되는 밀무역(密貿易)과 더불어 거듭되는 입초무역(入超貿易)의 '망국적' 실상을 지적했던 것도 이 같은, 미군정이 편 무역정책 선상에서 그 한 원인(遠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항만이 닫힌 상황에서도 광복 후 우리 손에 의한 최초의 무역이 인천항에서 시작된다. 1947년 3월 7, 8일경에 서울 종로 소재 삼기무역공사(三起貿易公社)가 한양선박주식회사의 제일한양호(第一漢洋號)를 중국 천진(天津)으로 출발시킴으로써 정식으로 대 중국 무역 첫발을 뗀 것이다. 수출입 품목은 당시 '가장 확실성이 있는' 수산품(水産品)이 주종이었다. 물론 이것은 미 군정청 무역국으로부터 대중무역(對中貿易) 허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외국 무역선이 인천항에 입항한 것은 같은 해 3월 12, 13일경, 영국 상선 '피리어드'호(다른 신문에는 미국 선박으로 표기된다.)에 의해 이루어진다.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가 한국에 대해 정식 허가를 한 첫 무역이었다. 그나마 이 무역이 성사된 것은 마카오 거주 우리 동포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무역물품은 우리에게 시급했던 소금, 생고무, 지류(紙類) 등과 서민 생활필수품들이었다.

또 같은 해 4월 3일에는 중국행 우편물이 금광환(金光丸)을 통해 인천항에서 처음으로 출항했는데, 이것을 시발로 매달 정기 우편물 발송이 시작된다. 우리 산품(産品)의 수출도 역시 인천항에서 최초로 이루어진다. 곧 군정청이 자국 상사와 협정을 맺어 중석(重石), 연(鉛) 등의 광물을 인천항을 통해 수출한 것이다. 수출금액 “백만 달러의 광물 인천항 발, 미국 진출”이라고 당시 공업신문이 보도하고 있다.

순수 우리 선박으로는 1948년 4월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 소속 앵도호(櫻島號)의 홍콩 출항이 최초였다. 4월 23일에 조인한 한일통상협정(韓日通商協定)에 의해 해운국 소속 단양호(丹陽號)는 처음으로 대일 정식 무역 항로를 개척했다.

▲ 1947년 1월 15일자 중외경제신문은 미군 점유하의 인천항의 현실을 ‘빈사(瀕死)의 백조(白鳥)’라고 표현했다.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1월에도 도크 북쪽 일부만 사용할 수 있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7년 1월 15일자 중외경제신문은 미군 점유하의 인천항의 현실을 ‘빈사(瀕死)의 백조(白鳥)’라고 표현했다.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1월에도 도크 북쪽 일부만 사용할 수 있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8년 7월28일자 공업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어려운 항만 여건 속에서도 당시 인천항이 국내 제1위의 무역항임을 특필하고 있다. 인천항이 총 수출입액 6억 2803만1735원으로 부산의 1억4406만771원을 단연 압도하는 액수였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8년 7월28일자 공업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어려운 항만 여건 속에서도 당시 인천항이 국내 제1위의 무역항임을 특필하고 있다. 인천항이 총 수출입액 6억 2803만1735원으로 부산의 1억4406만771원을 단연 압도하는 액수였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7년 수산경제신문이 1947년 3월 초순경에 중국 천진(天津)을 향해 우리 수출 선박이 인천항에서 출발함으로써 중국과 첫 정식 국제무역이 시작되었음을 보도한 내용이다. 아직 국제간 무역 절차가 정해지지 않아 수출 물자를 팔고 필요 물자를 사서 돌아오는 배[返船]에 싣고 오는 물물교환식 무역이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7년 수산경제신문이 1947년 3월 초순경에 중국 천진(天津)을 향해 우리 수출 선박이 인천항에서 출발함으로써 중국과 첫 정식 국제무역이 시작되었음을 보도한 내용이다. 아직 국제간 무역 절차가 정해지지 않아 수출 물자를 팔고 필요 물자를 사서 돌아오는 배[返船]에 싣고 오는 물물교환식 무역이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7년 3월 중순경, 영국 무역선 ‘피리어드’호가 소금, 생고무, 종이류를 싣고 최초로 인천항에 입항했음을 보도하는 조선경제신문의 기사이다.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가 한국에 대해 정식 허가를 한 첫 무역이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7년 3월 중순경, 영국 무역선 ‘피리어드’호가 소금, 생고무, 종이류를 싣고 최초로 인천항에 입항했음을 보도하는 조선경제신문의 기사이다.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가 한국에 대해 정식 허가를 한 첫 무역이었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한편, 1947년 8월, 당시 부산항을 미군항(美軍港)으로 정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듯하다. 그 무렵 미군은 부산에도 항만사령부를 설치했는데. 이 때문에 그 같은 설이 퍼졌던 것 같다. 그럴싸하게 인천항 부두시설을 부산항으로 이관한다는 말도 돌았던 모양으로, 실제 부산 미 항만사령관은 출입기자들에게 “상부의 명령으로 인천항 부두시설의 일부를 부산항으로 이관하라는 말이 있는데 실현될지 안 될지는 아직 모른다.”라고 답변하는 것이다. 특히 부산 쪽에서 크게 관심을 두었던 듯하다.

1947년 10월 1일, 운수부 해사국은 수입한 LST.FS형 선박 17척을 연안 여객, 화물 운송을 대비해 인천항을 출발점으로 해서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을 잇는 시운전을 개시한다. 이 결과에 따라 빠른 시일 안에 포항-울릉도, 목포-제주 간에도 여객, 화물선을 취항시킬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인천항에서의 정기운항은 1948년 8월에 들어 인천-옹진, 인천-군산 간 항로부터 시작된다.

1948년 1월 15일자 대중일보는 부산항을 비롯해 남한의 각 항구 모두가 무역선 출입이 빈번하다는 기사와 함께 겨울바람만 쓸쓸히 부는 인천항의 한산함을 안타깝게 보도하면서, 인천항에서의 검역을 비롯한 수속의 복잡과 정박 일정의 장기화 때문에 타항(他港)으로 회항하는 사태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의 부산신문은 “최근에 이르러 무역선이 부산항에는 입항하지 않고 인천항에만 입항하고 있다.”는 정반대의 보도를 한다. 원인은 무역 물자의 수송과 판로에 있어 중앙의 각 청(廳)과의 교섭이 인천항은 용이하고 신속한 데 비해 부산은 시간적으로 지연되는 등 지역적 차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천항과 부산항 간에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1948년 7월 28일자 공업신문을 보면 4월까지의 국내 무역은 여전히 고질적인 입초(入超) 상태의 “한심한 무역 조선을 시현하고” 있으나 수출입 총액에 있어서만은 인천항이 6억2803만1735원으로 부산의 1억4406만771원을 단연 압도하는 국내 제1위의 항구라는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혼란과 난관과 역경 속에서 우리나라는 드디어 정부 수립을 맞는다. '빈사의 백조' 같았던 인천항 도크 역시 그해 12월, 미군 측과 절반씩 나누어 사용하기로 양해가 이루어지면서 미군정 무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된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