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군수·원조 물자로 활기찬 인천항 …초대 시장 탄생도

인천항에 미군 군수물자 전문 하역
운송업체 생겨 노임만 월 1억 넘어

인천부의 미군정관 스틸만 소장
“품삯 못 정했는데 도와줘 감사”
첫 회견서 부두노동자 고마움 표현

대중일보 '수출없는 대중무역' 기사
우리 수출은 한 푼도 안 이뤄지고
화교들 무분별 생필품 판매 탄식

임홍재 인천 초대시장 1945년 취임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행사 치러

표양문 인천항 부두국 책임자
스틸만 인천 군정관에 발탁돼

초대 항무처장·인천시장에 올라
▲ 과거 인천항 전경./사진출처 =인천사진대관
▲ 과거 인천항 전경./사진출처 =인천사진대관

태평양전쟁 직전까지 전국 수입화물의 94%, 수출 81%를 점하고 있던 국내 제1의 무역항구 인천항은 일제의 패망으로 일시나마 고요와 한산함 속에 일말의 불안스런 기분마저 감돌았지만, 일제 항복 20여 일 후인 9월 8일, 인천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다시 얼마간 활기와 부산스러움을 찾게 된다.

인천항에 미군의 군수물자와 민간 원조물자를 양륙(揚陸)하고 운송하는 요긴한 일거리가 들어왔고, 거기에 따라 인천항에 미군 물자를 전문으로 하역, 운송하는 하역업체들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 하역업체들은 광복 전 일인들이 인천항에서 쥐고 있던 부두 노동자 관리 체계와 유사한 조직이었다.

부두의 하역 근로자에게 배포되는 노임만도 월 1억원을 넘었으니 인천 하역업계는 한때 인천 경제를 주름잡아 온 무시 못 할 업계였다. 하역업계 경기가 나아지자 군소 하역업자들이 난립하였으며 이로 인한 하역 질서 혼란이 생겨 외항선이 입항을 기피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내용은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의 기록으로, 광복 전 8000명 이상의 부두 주변 노동자를 보유하고 있던 인천항으로서는 광복 후의 무주공산,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나마 미군이 가지고 온 일거리를 그저 점잖게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항선이 입항을 기피'할 만큼 하역업계의 혼란한 흙탕물 싸움은 1948년에 이어 1949년에 거의 극에 이른다. 이 내용은 다음 회로 미룬다.

그러나 광복 초기, 한 달 반 동안의 인천항 사정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정적(靜的)이면서 막막한 모습을 보인다. 1945년 9월 30일자 매일신보 기사가 그런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인천부의 미군정관 스틸만 소좌는 29일 오전 10시에 부청 귀빈실에서 부내 각 단체 대표자와 신문기자단의 정례 회견 첫날에 다음과 같이 군정 시책을 피력하였다.

▲ 인천항에 몰려든 수십 척의 중국 정크선들. 참고로 이 사진은 1937년 9월의 당시 인천항에 중국산 소금을 싣고 들어왔을 때의 풍경인데, 광복 후 우리가 정상적인 국제무역 체제를 채 갖추기도 전에 인천항 밀무역에 나서 우리 경제를 더욱 교란시켰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인천항에 몰려든 수십 척의 중국 정크선들. 참고로 이 사진은 1937년 9월의 당시 인천항에 중국산 소금을 싣고 들어왔을 때의 풍경인데, 광복 후 우리가 정상적인 국제무역 체제를 채 갖추기도 전에 인천항 밀무역에 나서 우리 경제를 더욱 교란시켰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부두노동자는 우리가 상륙한 이래 우리들의 일을 매일하여 주어 감사하다. 아직 품삯은 결정하지 못했는데 이는 2·3일 내로 결정하겠다. 도립의원과 일본인의 개인병원은 대체로 불결하나 되도록 수선해서 조선인 의사를 거기에 배치시킬 터이다.

조선인의 이재민은 될 수 있는 대로 일본인을 일본으로 속히 보내고 그 배에 이재민을 데려 올 예정인데 이는 인천항을 중심으로 할 예정이다. 일본인의 부동산을 매매한다는 사실이 있는데 이는 매매를 해도 그 대금을 압수해서 은행에 예금할 터이다.

인천부윤 선임과 경찰서장은 10일내로 결정할 예정이다.”

한국인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비롯된 미군정의 정책 태도, 또 한국인 전문 인력의 부족에도 기인했을 것이나, 이 기사를 통해 개인병원 의사 배치 문제 같은 것에서부터, 이재민 문제, 적산가옥(敵産家屋) 처분 문제에 이르기까지 산적한 사안들이 고스란히 미해결로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천에 진주 불과 스무 날 남짓 만에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다 처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 기사를 읽으며 스틸만의 기자회견 첫 일성(一聲)이 부두노동자들에 대한 감사 인사였던 것은 이채롭다. 매일매일 자기들의 생활물품, 군사물자 하역의 차질 없음과 그 품삯을 아직 지불하지 못한 데 대한 유감의 표시였던 것인지….

아무튼 답답하고 느릿한 4개월 반 동안의 광복 첫해가 지나가고, 1946년에 들어서면서 인천항에 닥친 시급한 문제가 중국에 의한 밀무역이었다. 당시 우리는 무엇 하나 생산해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같은 사실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는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국내 제조업 부문에서 총자본의 90% 이상, 주요 기술직 80% 이상을 독차지했던 일인들이 물러감에 따라 수반된 생산 활동의 위축과 석탄, 전력 등 에너지 자원의 공급 불충분, 그리고 전국을 잇는 물류, 교통 기능의 마비가 겹친 결과였다.'

1946년 6월 9일자, 인천의 향토 신문 대중일보의 기사 내용은 차라리 암담함 그것이었다. 신문은 「수출 없는 대중(對中) 무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단 한 푼도 우리의 수출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소금, 고량주, 콩, 콩기름, 식초, 녹두가루, 고추, 당면, 양잿물 따위의 서민 생활용품이 인천 화교들의 손에 의해 불법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음을 탄식하듯 쓰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당시 자유신문도 '인천항에는 아직 통상대책이 서지 않았는데도 최근 중국으로부터 정크선의 왕래가 빈번한 까닭에 마치 대외무역이 시작된 느낌을 주고 있다'며, 무허가 중국 정크선의 기민하고도 극성스런 내왕을 보도한다. 이 정크선들에 실려와 인천항에 부려지는 화물 역시 모조리 서민 생활용품이었다.

이같은 중국의 밀수출에 대해 서울 군정청의 러치 군정장관은 '감시하고 있다'는 말만 외운다. 더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미군정 하에서 우리 세관이나 수출입 통제 기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의 희망과 기쁨은 이내 미군정이라는 또 다른 고난과 시련으로 바뀌었지만, 1946년, 광복 1주년은 여전히 뜨거운 감격이었다.

'도원공설운동장에서 있은 기념식에는 1만여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오전 11시 임홍재(任鴻宰) 시장의 개회사에 이은 의식(儀式)과 신임 군정관 프레시 소령, 이건웅(李建雄) 인천세무서장, 길영희(吉瑛羲) 인천중학교장, 인천시사회과장 순서로 이어진 축사, 그리고 신태범(愼兌範) 씨의 독립전취(獨立戰取) 결의문 낭독에 이어 만세삼창으로 식을 마쳤음'을 대중일보는 들뜬 목소리로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사실을 첨언한다. 1945년 미군정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한 것이 인천시의 행정 책임자와 인천항의 운영 담당자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정관 스틸만 소령은 9월 20일, 먼저 일인 부두국장을 파면하고 표양문(表良文)을 책임자로 해서 인천항부두국(仁川港埠頭局)을 접수한다. 이어 10월 10일에는 앞에 거명한 임홍재를 인천시장으로 최종 임명한다. 표양문은 이듬해 4월 인천부두국이 인천항무청(仁川港務廳)으로 개편되면서 초대 항무청장을 지내고, 후일 두 번이나 인천시장에 오른다.

일단은 이렇게 한국인에 의한 시 행정과 인천항 운영의 틀은 갖추나 이들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보조역에 지나지 않은 채,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이어진 군정 2년 11개월간, 햇수로 두 번째 해인 1947년을 맞게 된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