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재청 주관으로 '1883 러시아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사바틴이 남긴 공간과 기억'전이 작년 10월19일~11월 11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렸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문화재청장과 주한러시아 대사가 기자간담회에 직접 참여할 만큼 중요한 행사였다.

사바틴은 한국에 머무는 20여년 동안 인천과 서울에서 각각 10여년을 거주하면서 많은 근대건축물을 설계했다. 전시회가 열린 중명전은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는 스스로를 '대한제국 황제폐하의 건축가'로 칭할 만큼 구성헌, 중명전, 돈덕전, 정관헌 등 여러 궁궐 건축에 관여했다. 독립문, 손탁호텔, 러시아 서울영사관도 그의 작품이다. 사바틴이 인천에 남긴 건축물로는 인천해관(세관)청사, 제물포구락부, 세창양행 사택, 러시아 인천영사관이 있다.

사바틴이 조선에 머무는 동안의 행적을 샅샅이 다뤘다는 이 전시회에서도 등장하지 않은 건축물이 있다. 바로 인천 신동공사다. 신동공사는 조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이익을 위해 만든 자치기구로 마산, 목포는 물론 일본에서도 운영되었다. 1914년 조계제도가 철폐되기 전까지 개항장 인천에서 일본제국의 비호 아래 발호하던 일본인에게 상당한 압박을 가했던 곳이다.

인천 신동공사가 있던 장소는 인천 중구 송학동3가 3-1로 인성여고 다목적관에서 홍예문으로 오르는 길 우측에 위치한 공용 주차장 자리이다. 한여름철에는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신동공사는 1891년 5월7일 대지 3,780㎡를 2000달러에 구입하고 10월 22일 권리증을 받았다. 건물 신축에 대해서는 1892년 5월10일 회의에서 집중 논의하여 건축에 필요한 전반적인 내용을 정했다. 볼터(Wolter)가 방 4개로 구성된 본관과 별관, 경찰숙소, 창고 등이 그려진 설계도를 회의 안건으로 제시했다.

본관 외벽은 벽돌 두 장 두께(2B), 내벽은 한 장 두께(1B)였다. 실내 바닥에는 마룻널을 깔고, 문과 창문은 경목(hard wood)으로, 지붕은 일본식 기와로 마감한다는 내용도 거론된다. 특별히 외벽 두께에 대해서는 1B로 시공하면 공사비 200달러를 절약할 수 있으나, 장차 2층 증축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스트리플링(M. Stripling)이 제안한 경찰숙소 앞 포치와 숙소 창문 설치 안도 채택했다.

1892년 6월 7일 입찰공고를 거쳐 8월 25일 회의에서 가장 낮은 금액인 3200달러로 입찰한 중국인 루이링을 시공자로 결정했다. 신동공사는 회관에 입주하기 1년 전부터는 영국 인천영사관에서 회의를 열다가 1893년 11월16일 신축한 회관에서 첫 회의를 개최했다.

각국조계지 회의록에는 신동공사 설계자를 정확하게 언급한 내용은 없으나, 이를 추정할 만한 근거는 회의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공사감독과 설계변경을 책임지고 수행할 건축사로 사바틴을 선정했고, 그 비용은 볼터가 사전에 지불했다. 1893년 4월7일 회의록에는 신동공사 회관 시공에 관하여 사바틴의 조언을 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더구나 신동공사 본관은 제물포구락부와 형제라 할 정도로 닮아있다. 경사지를 이용하여 반지하 1층과 지상 1층을 두는 층 배치, 지하층은 석조로 지상층은 벽돌조로 쌓은 구조방식에 눈이 간다. 디테일에 이르면 두 건물의 유사성은 더욱 확연해진다.

여러 정황상 세창양행 사옥, 헨켈 저택도 사바틴이 설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참에 러시아 인천영사관-인천세관(해안동)-홈링거양행-제물포구락부-자유공원-세창양행 사택-신동공사로 이어지는 사바틴 루트 개발도 검토해 볼 만하다.

신동공사 관련 자료가 적어 대중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영인해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자료인 'Foreign Settlement, Chemulpo Minutes vol. Ⅰ(1891)', vol. Ⅱ(1893)'는 가뭄에 단비 같은 사료이다. 인천학연구원은 이를 번역한 '제물포각국조계지 회의록1,2'를 발간해 일반인의 접근성을 높였다. 사료는 연구의 토대다. 인천자료를 수집 관리하는 인천아카이브 구축을 다시 촉구한다.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