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관중으로 진행된 SK와이번스 경기를 보고 있는 시민 .

야구 경기를 실제로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쯤이었다. 여름방학 때 도원동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전국 단위의 고교 야구대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며칠간 치르는 모든 경기를 보려면 '프리패스 배지'를 구입해야 했다.

모친은 세 살 터울 형과 하루씩 번갈아 보라며 배지 하나만 구입할 돈을 주셨다. 형제는 머리를 굴렸다. 배지 하나를 사서 먼저 형이 가슴에 달고 입장한 후 1루 쪽 스탠드 끝에 가서 배지를 몰래 밖으로 던져주었다. 나는 운동장 밖 길가에서 기다렸다가 배지를 주워서 달고 심장이 쪼그라들며 입장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그렇게 야구장 문을 통과했다. 오전에 들어가 어둑해질 때까지 형제는 야구경기를 봤다. 점심은 모친이 양은 도시락에 싸주신 고구마로 때웠다. 야구장 가는 게 너무 행복했다. 송현동 집에서 배다리철교를 지나 도원동 철길 옆 철공소들을 거쳐 운동장 가는 길을 한달음에 달려갔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주말에 틈만 나면 친구들과 함께 도원구장으로 향했다. 개막 첫해 인천연고팀 삼미슈퍼스타즈는 80전 15승 65패 승률 0.188로 꼴찌였다. 비록 성적은 슈퍼스타가 아니었지만 야구장 가는 게 그냥 행복했다.

최근 인천은 SK와이번스에게 급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았다. 벌써 다섯 번째 헤어짐이다. “간다고? 그래 잘 가라.” 짐짓 쿨한 척 하고 있지만 지금 인천인들은 졸지에 강우 콜드 패를 당한 기분이다. 인천은 일제강점기 야구로 민족정신을 깨웠던 한용단(漢勇團)의 정신이 야구공 실밥처럼 촘촘하게 배어 있는 곳이다.

새로운 연고팀이 인천 야구의 자존심을 '쓱' 살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구마로 점심을 때우며 '인천'을 외쳤던 그 소년에게 야구장의 또 다른 '신세계'를 열어줬으면 한다.

/인천시립박물관장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