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 추도식에 참석했다. 선생은 1933년 중국 길림성 훈춘에서 항일유격대원 박승진과 모친 채성녀의 5형제 중 넷째로 출생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귀국하여 만경대혁명가유자녀학원을 1950년 9월 졸업했다.

선생은 1959년 6월20일 연락책으로 남파되어 그해 12월 체포돼 국가보안법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대구교도소에서 수감 생활하던 중에 이른바 '붉은별' 조직 활동사건으로 무기징역이 추가돼 2중 무기수로 복역했다.

1993년 긴 징역과 전향공작으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무게가 40kg에 이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병보석이 거론됐으나 법무부는 남쪽에 연고가 전혀 없는 선생에게 선생을 받아줄 인수자를 요구했다. 마침 교도소에 함께 있던 전국농민회 배종렬 회장이 장기수 구명 활동을 하고 있던 무안의 임영창 목사를 주선해 주었다.

보석 조건으로 전향서를 고집하던 대구교도소가 선생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임 목사의 '신병인수서'로 받고 병보석을 허락했다. 마침내 그해 12월24일 선생은 세상으로 나왔고 임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거처를 두고 학교 매점에서 일하며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통일운동가로 평생을 살았다.

2000년 6_15선언으로 비전향장기수 송환이 합의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들떠 있던 선생에게 전해진 비전향장기수 북송자 명단엔 '박종린'이란 이름은 없었다.

연유를 따지는 선생에게 당국은 '신병인수서'가 종교에 귀의하여 전향한 것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 가혹한 전향공작에도 신념 하나로 34년을 버텨온 박종린을 전향자로 분류해 버린 것이었다. “신병인수서에 '전향'의 '전'자 한 글자도 없었다”는 목사들의 격렬한 항의에도 통일부 당국은 요지부동이었다.

결혼한 지 1년 남짓 여전히 새색시 같은 아내와 태어난 지 겨우 100일이 된 딸을 두고 잠시 다녀오겠노라 나선 길을 41년 만에 돌아가 가족을 마주할 기대에 들떴던 잠시의 꿈이 부서진 현실을 마주하기 어려웠던 선생은 2000년 9월 1차 송환된 분들이 운영하던 고서적방을 인수하여 과천으로 이사했다. 이후 1차 송환에서 제외된 장기수들과 함께 송환을 요구하며 백방으로 나섰지만 곧 이루어질 것 같았던 2차 송환은 기약이 없었다.

남북관계의 부침 속에서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붙잡고 버티던 선생은 2017년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투병생활 중에 선생은 '오마이뉴스'와 가진 6_15선언 20주년기념 인터뷰를 통해 “남녘 동포들이 힘들게 일해서 낸 세금으로 매달 69만원과 요양보호까지 받고 있으니 제게 남녘 동포들은 선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남녘 동포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제 마음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코리아라는 하나의 조국이 있지요. 어서 하나의 나라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라는 말씀을 유언처럼 남겼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의 역사는 1993년 3월 김영삼 정부의 '리인모' 북송으로 시작되어 2000년 9월 김대중 정부는 6_15선언 합의로 63명의 장기수를 송환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2005년 10월 사망한 정순택의 시신을 북으로 보냈다. 박종린 선생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가서 외동딸 옥희 그리고 사위와 손주들을 안아보고 어머니와 아내 묘소를 찾아 고통만 안겨줘서 미안하다고 사죄도 하고, 일제의 감옥에서 고생하셨던 아버지의 묘소에 술 한잔 올리고 당신 자식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일본의 공식적 사과 한마디 듣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요구를 묵살하는 일본정부의 태도가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이라고 거세게 비난하는 우리가 자신의 신념과 소신을 지키며 살아온 비전향장기수들의 소원 '북으로의 송환' 요구를 무시하는 대한민국의 태도에 무관심하고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무심한 것은 이중적이지 않은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바란다. 비전향장기수도 누군가의 가족이며 그의 유골만이라도 돌려받기를 원하는 유족이 있다는 것과 사람 비전향장기수가 남은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소원이 '북으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시라. 그래야 노무현의 사람 사는 세상이고,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인 나라다.

/정세일 생명평화포럼 상임대표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