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제물포 개항 이후 유입된 서양 음악은 한국의 정서와 융합된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즐겨 듣는 다양한 음악의 모습으로 자리잡는다. 인천을 통해 모든 서양 음악이 유입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 문화 수용의 요충지로 한국의 서양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인천을 통해 유입되거나 전개된 서양 음악을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서양 음악의 발화지인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하지만, 정확히 어떤 음악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깊지 않다.

인천의 근대 음악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음반 발매를 앞둔 요즘, 인천과 관련된 근대 음악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서양 음악과 인천의 연결고리가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가지는 것에 공감한다. 한국의 서양 음악사에서 인천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잘 알려지지 않음에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서 음반을 준비하면서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만큼이나 음악이 지역과 어떤 연관성을 맺을 수 있으며,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을까. 즉, 인천의 근대 음악은 어떤 모습일까.

1882년 미국은 조선의 문을 두들긴다. 그리고 인천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당시 체결을 알리는 미국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울린 첫 번째 서양 음악이었다. 1885년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입국하며 서양 악기와 음악을 보급했다. 어느새 서양 음악은 우리의 정서와 혼합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양 음악을 자주독립 국가 선포와 국민의 정신을 집약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근대의 상징인 철도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어 불렀으며, 이방인이 엔카 풍으로 편곡한 아리랑도 존재했다. 어느덧 이 땅에도 서양 음악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조선인이 나타났다. 기생 조합인 권번의 예인들은 서양풍의 노래도 불렀으며, 외국인 선교사와 전문 음악가로부터 사사한 조선인은 한국 정서가 깃든 서양 음악 작품을 만들어 보급했다. 학교에서는 창가를 가르치고, 성인들은 시대의 애환이 담긴 유행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근대 인천에 뿌리내린 서양 음악은 시민의 삶과 함께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케케묵은 옛것이 되어갔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개화기 음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인천의 근대 음악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 음악이 처음으로 보급된 시대의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단순히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기 위한 유흥 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서양 문물 유입에 의미를 부여하는 서구 중심주의적인 사고도 아니다.

리처드 셰크너의 공연이론처럼 음악은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는 다시 음악에 반영된다. 즉 근대 인천에서 발화된 음악을 통해 당시 사회를 돌아볼 수 있으며, 사회가 어떻게 다시 음악에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천의 근대 음악을 돌아보는 것 자체가 근대 인천의 사회를 돌아보는 행위이다.

사실 개화기와 21세기 현재 사회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신문물이 밀물처럼 쏟아져 오고 사람들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수용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인천 콘서트 챔버의 음반 '인천근대양악열전'은 인천의 옛 음악을 발굴하여 해석하고 소개하는 것을 넘어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질문 거리를 던져주고자 한다. 사실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디딤돌이 되고자 함이다.

/이승묵 인천 콘서트챔버 대표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