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어시장·잡화점, 민족의식·개화로 생활상 변화 이끌어

양·청·일본인 잡화 들여와 … 직·간접 체험 개화의식 생겨
1910년 내동·1920년 배다리까지 번화가 … 옷감 상점 많아
한인 상점 자본 영세 했으나 외국인 상점과 꿋꿋이 겨뤄

정흥택·순택·세택 삼형제 신포동서 '어시장' 세워 성공
일본인 상점 누르고 우뚝 …빈민구제·조선인 학교 지원도
▲ 중구 북성동 지금의 인천항 8부두 자리에 있었던 인천수산시장 건물. 1934년 9월22일에 준공. 일제는 인천의 도매어시장과 경매어시장을 이곳에 통합하려 했으나 정흥택의 뚝심에 막혀 결국 도매어시장은 정흥택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기로 결정되고 말았다. 오른쪽 상단에 월미도 동쪽 끝단이 보인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중구 북성동 지금의 인천항 8부두 자리에 있었던 인천수산시장 건물. 1934년 9월22일에 준공. 일제는 인천의 도매어시장과 경매어시장을 이곳에 통합하려 했으나 정흥택의 뚝심에 막혀 결국 도매어시장은 정흥택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기로 결정되고 말았다. 오른쪽 상단에 월미도 동쪽 끝단이 보인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제물포 서민들의 생활 변화는 인천항에 서양인과 청인, 일인들이 들여온 일상 잡화가 큰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논리는 이미 앞에서 상정(想定)한 바 있다. 개항 초기, 제물포 주민 대부분의 구매력으로는 수입 잡화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 편리와 효용을 직접 목격하거나 전문(傳聞)함으로써 차츰 생활 변화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리라는 내용이다.

이는 곧 신태범 박사가 “인천 사람들에게는 개화는 이미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매일같이 일인과 양인을 통해 직접 견문하고 있는 낯익은 생활이었다.”는 언급과 통한다.

▲ 1920년대 중구 내동에 포목상 개풍상회(開豊商會)를 차려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이규옥(李珪鈺)의 모습이다. 당시 한국인 중에 영업세를 가장 많이 내던 최고 부호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천에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등 민족의식이 높았던 인물이다./사진출처 =간추린 인천사
▲ 1920년대 중구 내동에 포목상 개풍상회(開豊商會)를 차려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이규옥(李珪鈺)의 모습이다.
당시 한국인 중에 영업세를 가장 많이 내던 최고 부호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천에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등 민족의식이 높았던 인물이다./사진출처 =간추린 인천사
▲ 정흥택의 바로 밑의 아우 정순택의 모습이다. 형과 함께 인천에 이주해 생선전을 설립하고 매일 서울 어시장에 생선을 공급하는 책임을 맡았다. 1926년 제3회 인천부협의회(仁川府協議會)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자선가로 당시 시내 조선인 학교에 수시로 의연금을 내는가 하면 빈민 구제에도 솔선한 미담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정흥택의 바로 밑의 아우 정순택의 모습이다. 형과 함께 인천에 이주해 생선전을 설립하고 매일 서울 어시장에 생선을 공급하는 책임을 맡았다.
1926년 제3회 인천부협의회(仁川府協議會)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자선가로 당시 시내 조선인 학교에 수시로 의연금을
내는가 하면 빈민 구제에도 솔선한 미담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실제 제물포 주민들로 하여금 문명한 물건의 적극적인 구매를 독려하면서 의식의 변화를 고무(鼓舞)하는 글도 있다. 주민들의 의식 변화가 실업계의 반동력(反動力)을 촉진하는 계기임을 설파하는 내용이다. 본 연재 제7화에서 소개한 바 있는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 서기장 강 전(姜筌)의 글로서, 1912년 당시 기관지『상계월보』에 실려 있다.

모든 인류는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 또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욕망이 있는 것이며 욕망이 있은 이상은 쾌락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가 수식완상(修飾玩賞)의 물품을 좋아하지 않으리오. 이런 때문에 번화기려(繁華奇麗)의 물건은 실로 문명한 정도를 따르는 것이니 우리는 아무쪼록 잡화의 정묘기교(精妙技巧)한 물품을 다수 사서 씀으로써 옛날의 지둔박루(遲鈍樸陋)한 사상을 혁신하고 인류의 고유한 욕망적 쾌락을 충족케 하기를 연구하되 허영심을 소각하고 황착력(況着力)을 배양하여 부지런히 농상공(農商工)의 업무를 근면해야 할 것이다. 그런즉 잡화를 기호(嗜好)하는 정신은 진실로 실업계의 반동력을 촉진하는 자(者)라 할 것이다.

▲ 1927년 1월 3일자 중외일보에 실린 문방구점 이림상회(李林商會) 광고문이다. 중구 내동에 있었던 이 상점은 이종윤(李種潤)이 선영사(鮮英社) 인쇄소를 차리기 전, 한국인 촌에 단 하나뿐인 활판인쇄를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27년 1월 3일자 중외일보에 실린 문방구점 이림상회(李林商會) 광고문이다. 중구 내동에 있었던 이 상점은 이종윤(李種潤)이 선영사(鮮英社) 인쇄소를 차리기 전,
한국인 촌에 단 하나뿐인 활판인쇄를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강전이 상품을 통해 '인류의 고유한 욕망적 쾌락을 충족'시키도록 물건의 질과 사양을 '정묘기교'하게 연구해 그것이 우리 실업계의 동력이 되게 해야 한다는 취지다. 인간의 물질 욕망과 괘락 원리까지 거론한 사뭇 진보적인 이 주장이 당시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모르나, 국민들이 속히 우리 상공업 발전을 통해 '문명한 역(域)에 스스로 진(進)'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추측컨대 이 무렵을 기점으로 인천항에 손꼽을 만한 조선인 상점들과 붙박이 어시장(魚市場) 같은 상업시설의 출현은, 개항장에 수입된 외래 문명 상품들을 직간접으로 경험함으로써 '잡화를 기호하게 된' 제물포 서민들의 개화 의식이 부추겼다는 사실이다.

▲ 1925년 11월 12일자 시대일보에 게재된 전인천소년축구대회에 격려 물품을 기증한 인사들의 명단이다. 주단포목상 이창문(李昌文)은 그 시절 진귀한 물품이었던 수건 1다스를 기증한 것으로 나와 있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25년 11월 12일자 시대일보에 게재된 전인천소년축구대회에 격려 물품을 기증한 인사들의 명단이다. 주단포목상 이창문(李昌文)은 그 시절
진귀한 물품이었던 수건 1다스를 기증한 것으로 나와 있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1910년대에는 내동거리에만 있던 상가가 1920년대에는 배다리까지 번화가를 이루게 되었다. 내동에는 대동상회(양품 잡화), 개풍상회(포목 도산매), 대양상회(석유대리점), 박재중상점(고무신 도매업), 임상진상점(건어물상), 이림상회(문방구점), 태풍상회(주단상), 천은사(금은상) 등이 있었다. 그 후 경동에는 연이어서 안기영상점(고무신 도매업), 칠복상회(주단상), 금룡상회(주단상), 이창문상점(주단상) 문운당(문방구점) 박풍년상회(포목상), 오정섭상점(주단상), 금상회(지물포), 원흥상회(기물상), 김용권제과소(과자류 판매), 만화상회(도자기상), 용동가구점, 이학순제면소, 천지양행(주단상), 희문당(문방구점) 등 각양각색의 대소 상점이 즐비했었다. 이 거리에는 한약국, 목공소, 대장간, 이발소, 정육점 등도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신태범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의 내용이다. 가장 시급하고 다중(多衆的)인 것이 입성 문제였던 까닭에 주단포목 같은 옷감 상점이 단연 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인천이 항구였기에 탄생하게 된 고무신을 비롯해, 수입 생활 물품들의 영향으로 문방구류, 기물, 과자, 도자기 등을 판매하는 전에 없던 상점들이 생겨났음도 살필 수 있다.

이들 한인 상점 대부분은 자본의 영세로 인해 대규모로 발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일인 상점들에 밀리지 않고 꿋꿋이 어깨를 겨루고 있음으로 해서 민족의식 고취와 함께 인천항 한국인들의 생활을 '문명한 역으로 진'할 수 있게 이끌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시장은 서울 청파(靑坡) 출신 정흥택(鄭興澤), 순택(順澤), 세택(世澤) 세 형제에 의해 생겨났다. 원인천 지역은 원래 정기장(定期場)도 서지 않던 곳이었는데, 이들 형제에 의해 신포동 터진개에 상설 어시장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 어시장은 상설시장의 시초로 인천시장사(仁川市場史)에 기록된다.

중구 신포동 터진개에 있던 정흥택(鄭興澤)의 어시장에서 안타깝게도 화재가 발생했다는 1926년 3월 18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 서울 출신 정흥택은 아우 순택(順澤), 세택(世澤)과 함께 개항 당년에 인천에 내려와 1906년, 화재 현장인 신포동 42번지에 인천 최초의 상설 어시장을 차렸다. 그는 일제의 시기와 견제를 이겨내고 인천항 수산계의 거물로 군림했다.(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정흥택의 말제(末弟) 정세택은 두 형을 도와 생선전 운영에 힘쓰는 한편 인천부협회의와 인천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냈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정흥택의 말제(末弟) 정세택은 두 형을 도와 생선전 운영에 힘쓰는 한편 인천부협회의와 인천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냈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정오택(鄭奧澤) 씨는 현 인천부회 의원 정흥익(鄭興翊) 씨의 부친으로 개항 당년에 영제(令弟) 순택(順澤), 세택(世澤)의 양씨(兩氏)와 같이 경성으로부터 인천에 이주하야 형제 3인이 협력일치하야 행상으로부터 어상(魚商) 경영에 기초를 수립하야 간난신고(艱難辛苦)와 건투한 결과 개항 23년 후에는 신정(新町)에 어시장을 건설하야써 인천 생어시장(生魚市場)의 실권을 지배하야 내(來)하게 된 분투의 인(人)으로 목하 차제(次弟) 순택 씨는 경성 생어시장의 주요 공급인(供給人)으로 활약 중이고 말제(末弟) 세택 씨는 인천상공회의소에 의석을 유(有)한 등 정씨의 일문(一門)은 수산 방면의 성공 개척자다.

1933년 인천 개항 50주년 기념 특집으로 어상(魚商) 정흥택을 인터뷰한 매일신보 기사이다. 간략하지만 정씨 3형제가 신정(신포동)에서 어상으로서 성공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무슨 까닭인지 정흥택의 이름이 정오택으로, 그리고 그의 아들 이름이 정흥익으로 기재되어 있다. 오식(誤植)인 듯싶다.

정씨 형제가 어업도 우리보다 훨씬 선진화되고, 어선도 대형화된 데다가 자본으로도 우세한 일인 상점들을 누르고 인천항 어시장의 일인자로 우뚝 선 사실은 실로 대견하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인천항의 서민 생활 변화는 애초 외국인 장사꾼들이 들여온 생활 잡화에 자극된 바 있었으나, 1906년 어시장의 등장과 1910년대 내동 일대에서 시작해 1920년대 배다리까지 본격적인 우리 한국인 잡화 상점들이 늘어나면서 민족의식의 견지와 함께 개화로의 생활 변화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