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 구석구석 파편 고통
육안 피해 확인 어렵다고
보상커녕 매번 장애 입증
기초수급비 매달 50만원
여관·약값내면 거의 굶어
▲ 지뢰피해자 이근섭씨가 지뢰 폭발로 입은 상처를 드러 내 보이고 있다. /사진제공=경성대 사진학과 김문정 교수

#지뢰가 남기고 간 가난

3평 남짓, 사람 한명 눕기도 벅차 보이는 좁디 좁은 방. 지뢰피해자 이근섭(59)씨는 수년째 여관방 살이를 전전하고 있다. 사고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지만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가난의 그늘과 지뢰 피해로 인한 고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그에게 매달 지급되는 금액은 50만원가량. 여관비 30만원 정도를 내고 나면 겨우 10만원 정도가 손에 쥐어질 뿐이었다. 이마저도 지뢰 피해로 인한 후유증에 약값으로 쓰고 나면 끼니를 거르는 날이 허다했다.

“식사는 하루 한 끼 해결하는 것도 거를 때가 많죠. 그나마 무료급식소라도 열린 날은 운이 좋은 편입니다.”

이씨는 지뢰 폭발 사고로 몸 정 가운데 움푹 패인 상처가 있다. 보이지 않는 파편들이 구석구석 그의 몸에 박혀 있지만 겉이 멀쩡해 보인다는 이유로 늘 지원 자격에서 제외됐다.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하는 것처럼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매번 장애를 스스로 입증해야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시 관련 서류를 머리맡에 두고 있습니다.”

이씨가 지뢰 피해를 입은 건, 70년대 초반 당시 그의 나이 10살 되던 때였다. 이씨는 둘째 형과 이웃집 남매 일행 등 5명이 함께 개울가를 찾았다가 봉변을 당했다. 개울가에서 발견한 지뢰를 장난감 삼아 이리저리 휘두르던 중 '쾅'하는 굉음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씨와 함께 있던 모든 일행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커다란 맷돌처럼 생긴 게 개울가 주변에 있었죠.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전차 지뢰라는 것이더군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모두 죽고 난 뒤였죠.”

지뢰가 폭발하면서 파편들이 이씨의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때마침 사고지점 인근에서 길을 닦던 군용차가 쓰러진 이씨를 발견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온몸에 박힌 파편들은 빼내고 도려봐도 여전히 그의 몸을 파고들어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몸을 닦아낸 수건을 짜내면 피가 물처럼 쏟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사고 당시엔 모두 가망이 없다며 포기를 했었죠. 1년 정도 치료받고 나서야 그나마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깊은 상처는 후유증이라는 이름으로 이씨를 더욱 괴롭혔다. 이씨와 그의 부친은 상처에 좋다는 약초를 쓰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다녀야 했다.

“부모님께서 절 치료하기 위해 수도 없이 애를 쓰셨죠. 그도 그럴 것이 둘째 형을 지뢰 폭발로 잃고 큰 형도 불발탄 피해로 세상을 떠나보내야만 했는데 오죽하겠나 싶죠. 아들 둘이나 지뢰 폭발로 잃다 보니 제 치료에 상당히 애를 써 주셨습니다. 결국 부모님은 속앓이만 하시다 돌아가셨네요.”

5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빼내지 못한 파편들로 온몸 성한 구석이 없다. 특히 배에 움푹패인 파편 자국은 사고 당시 끔찍한 상황을 짐작게 한다.

여기에 사고 폭발음으로 인한 난청 증상도 날이 갈 수록 심해졌다. 그런데도 몸에 고통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건 찌들대로 찌든 가난의 족쇄였다.

“저에게도 먼 친척들이 있지만 왕래를 하며 지내고 있지 않습니다. 거지가 오면 손 벌리러 온 줄 알기에 쉽사리 찾아가기가 망설여지더라고요. 난방비를 내지 못해 냉방에서 자는 일도 허다했죠. 이제는 그만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네요.”

세상살이에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 지난해 12월, 일생일대의 순간이 찾아왔다. '인생나무 인생사진' 전시에 참여를 계기로 이씨는 작지만 다시금 삶의 희망을 품게 됐다.

“영웅이 된 것 같더라고요. 카메라에 찍힌 제 모습을 보고나니 폼 좀 나던데요. 대통령도 이런 사진 못 찍어 봤을걸요? 하루라도 빨리 보상지원 문제가 해결돼 저도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