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따가운 시선 집중됐지만
증상일기 기록한 남성 소식부터
치료센터 설치 동의한 주민까지
위기 속에도 방역당국 믿고 따라
언제쯤이면 끝날까. 매일 곱씹고, 바란다. '오늘도 무사히'.
코로나19가 2020년을 뺏어갔다. 이 시간에도 몹쓸 바이러스는 어디서 마수(魔手)를 뻗었는지 알 수 없다. 한뼘 남짓 마스크가 생명을 지켜내는 유일한 파수꾼이다. 더는 버틸 힘도, 여유도 사그라졌지만 그래도 신발 끈을 고쳐맨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가족이 무너지고, 회사가 휘청이며, 사회가 주저앉는다. 긴 터널 끝의 '일상'을 기대하며 300만 인천시민은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코로나19 시작은 인천이었다. 2020년 1월20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에 갈 예정이던 중국인 여성이 인천공항 환승 도중 '코로나19' 확진자로 분류돼 인천의료원으로 긴급이송됐다.
세계의 이목이 인천으로 향했다. '과연 동북아 허브도시로 자리 잡은 인천이 전염병마저 잘 이겨낼까'. 싸늘하던 시선은 우리나라 관문이자 방역 1번지인 인천의 저력에 감탄했다. 이 여성은 인천의료원의 선진 의료시술에 완쾌돼 중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의료진의 정성 가득한 인술에 이 중국인은 “의료진은 나의 영웅”이라며 감사의 편지를 전하며 엄지를 세웠다.
그리고 여행 가이드로 활동하던 미추홀구 50대 남성은 혹시 모를 감염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홀로 뚜벅뚜벅 인천의료원을 찾았다. 증상 발생 당시를 빼곡히 기록한 일기 역시 화제가 됐다.
조심조심 최선을 다한 인천시민의 노력에도 지난해 2월 신천지 교회발 1차 대유행으로 한순간 무너지며 인천 곳곳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 세계가 우리나라를 향해 빗장을 걸어 잠그며 인천공항과 인천항은 사람이 찾지 않는 유령시설로 전락했다.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강력한 봉쇄로 인천시민 삶은 피폐해졌고, 살림은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정부와 인천시의 선제적 조치를 믿고 따랐다.
그러나 진정 국면이던 코로나19 사태는 지난해 8·15 광복절을 즈음해 다시 2차 대유행을 맞았고, 찬바람과 함께 찾아온 매서운 3차 대유행으로 겨우 생의 끈을 붙잡고 있다. 특히 봉쇄에 봉쇄가 이어지며 소상공인·자영업자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었고, 그들의 뼈를 깎는 고통과 맞바꾼 희생에 인천이 위태롭게 서 있다.
인천의 바이러스 유입을 막기 위한 다양한 시도는 놀라웠다. 차량에 탄 채로 감염병 검사를 받는 승차 검진(드라이브 스루)은 세계 으뜸 사례로 각광받고 있고, 신속하게 확진자를 찾아내는 진단키트와 실시간 검사를 위해 인천보건환경연구원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인천시민은 생활치료센터 설치에 동참하며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였고, 방역당국은 숨어 있는 확진자를 찾기 위해 꾸준한 반복 검사와 검역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코로나19는 인천의 사각지대를 여실히 드러내는 등 숙제도 안겼다. 인천시민은 촘촘한 복지망을 아쉬워했고, 한반도 관문이지만 감염병 전문 병원조차 없는 현실에 분개했다. 심지어 타 지역의 발 빠른 재난지원금 지원 조치에 부러워하고 있다. 300만 인천시민이 끈질기게 버텨낸 2020 코로나19 분투기를 되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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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기자 leejy96@inchoe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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