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바퀴] 제24화 제물포의 변화 2. 문명의 꽃, 전기와 상수도의 상륙
[현대사 한바퀴] 제24화 제물포의 변화 2. 문명의 꽃, 전기와 상수도의 상륙
  • 인천일보
  • 승인 2021.01.10 17:21
  • 수정 2021.01.10 16:48
  • 2021.01.11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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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전기·상수도…조선인 가정은 그림의 떡

1884년 에디슨회사서 발전기 설치
경복궁서 1887년 첫 전깃불 켜져

인천전기주식회사 1905년 설립
인천항에 전등 1906넌 처음 켜져
조계 위주 … 조선 가정 혜택 못받아

1920년대 일본인촌 근접
조선 가정과 상점도 전등 켜

매갈이공장 등 전기모터 사용
인부대신 모터로 …실업자 늘어
로봇의 등장 현대인 우려와 비슷

인천 축항갑문·정미 모터·공업
전동력 하루 마필 4만8000여두
1924년 매일신보 기사로
인천항, 산업 에너지 중요 위치

1910년 노량진 수원지로 인천 급수
초기 일본 위주 … 조선 안중에 없어
1912년말 인천 조선인 28% 혜택
중외일보 1928년 유감 표명

일본이 수도사업 서두른 이유
위생적 민간 음용수 조달 외
선박 급수·군 식수 보급 필요 탓
▲ 중구 송월동 2가 22번지에 있었던 인천전기주식회사 건물이다. 현재는 한국전력 인천지점 창고가 되어 있다. <br>1905년 6월 일본인 3인과 세창양행 책임자인 칼 월터 등이 발기하여 설립한 인천 최초의 전기회사였다. <br>경기침체, 경영악화, 자본 한계 등에 부딪쳐 1911년 서울의 일한와사주식회사에 매각되어 그 지점이 되었다가 1915년에 <br>​​​​​​​경성전기주식회사 인천지점으로 개칭되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중구 송월동 2가 22번지에 있었던 인천전기주식회사 건물이다. 현재는 한국전력 인천지점 창고가 되어 있다.
1905년 6월 일본인 3인과 세창양행 책임자인 칼 월터 등이 발기하여 설립한 인천 최초의 전기회사였다.
경기침체, 경영악화, 자본 한계 등에 부딪쳐 1911년 서울의 일한와사주식회사에 매각되어 그 지점이 되었다가 1915년에
경성전기주식회사 인천지점으로 개칭되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위에는 인천전기주식회사 사옥, 아래는 보유 발전시설로 홍보용으로 제작한 사진이다. <br>인천전기주식회사는 당초 직류 발전기 2대로 100Kw의 전기를 생산하는 화력발전 시설이었다. 1910년 잠시 경기가 호전되었으나<br>​​​​​​​ 1911년 축항이 기공되면서 발전설비 증설 여력 부족으로 매각되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위에는 인천전기주식회사 사옥, 아래는 보유 발전시설로 홍보용으로 제작한 사진이다.
인천전기주식회사는 당초 직류 발전기 2대로 100Kw의 전기를 생산하는 화력발전 시설이었다. 1910년 잠시 경기가 호전되었으나
1911년 축항이 기공되면서 발전설비 증설 여력 부족으로 매각되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전회(前回)에서 우리는 개항과 더불어 인천항에 개화 신상품들이 도래함으로써 그것이 서민생활에 미쳤을 변화를 대략 짐작해 보았거니와, 이번 회에서는 그 뒤를 이어 서구 문명의 꽃이라 할 전등불이 당시 인천항을 어떻게 밝혔는지를 알아보자.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깃불이 켜진 때는 1887년 3월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전등불이 경복궁 안에 켜진 것인데, 실제로는 1884년 7월, 왕궁에서 미국 에디슨회사에 주문해 발전기를 설치했다고 하니, 시험 삼아 켰던 전기 불빛이지만 이때가 최초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고종은 한밤중에 난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대궐 안에 전등을 밝히고 새벽까지 밝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그 전등의 비용은 1천 민(緡)의 돈이 소비되었다.”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록을 소개한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 중에 고종이 전등불을 가장 소중히 여긴 인물일 듯싶다. 여기서 '민(緡)'은 '돈 꾸러미 민 자'이다.

인천항에 전등이 처음 켜진 때는 서울 종로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고도 6년이나 지난 1906년이었다. 그나마 전기 도입이란 것이 인천 거주 일인들이 중심이 되어 1905년 인천전기주식회사 설립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각국조계의 서양인이나 일인 상가, 가정 위주로 불을 밝힐 수 있었을 뿐, 이곳 조선인 서민 가정이 온전히 다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20년대를 지나면서는 일본인촌과 근접한 답동, 내동 등의 일부 조선인 가정과 상점들은 전등을 켜고 제법 개화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가 1923년 12월, 답동에 거주하는 전기 수용자(需用者) 김덕영이라는 사람이 경성전기주식회사인천지점 모 직원으로부터 억울하게 전기 무단 가설 및 전력 절도(竊盜)의 누명을 쓴 데 대해 결백을 주장하며 전기회사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일이나, 신화수리에서 계약 전등보다 전력량 소모가 많은 전등을 사용했다며 도전(盜電) 운운하는 사건 등이라고 할 것이다.

문명의 이기(利器) 전기가 인천항에 도입되어 일어난 변화는 실로 컸을 터인데, 서민들이 일상에서 누린 편리나 변화에 대한 생생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기로 인해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게 된 사례만 눈에 띈다.

▲ 오늘날의 신생동 초입의 밤 풍경이다. 휘황한 전등불 조명 아래 일본인들은 흥청망청 주인 노릇을 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오늘날의 신생동 초입의 밤 풍경이다. 휘황한 전등불 조명 아래 일본인들은 흥청망청 주인 노릇을 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괴로운 선미여공(選米女工)의 동맹파업(同盟罷業)을 면할 뿐 아니라 계리상(計利上)에도 유리하다 하여 인천 정미업자들이 인공(人工) 대신에 기계를 사용하기를 시작하여 인천 여공계(女工界)에 공황을 일으키게 함은 누차 보도한 바이어니와 요즈음 수천 명의 인부를 사용하는 인천 60여 처 조선인 '매갈이공장'에서는 전기(電氣) '모터'를 사용하는 경향이 점점 왕성하여 대부분은 설치 혹은 설치의 계획 중임으로 설치한 곳은 6할(割) 이상의 종업 인부를 도태하였으며 '모터'가 설치될수록 실업자는 격증될 터이라 하여 인천 노동계의 공황을 일으키었다는데 '매갈이공장'의 전화(電化)는 3할 이상의 경비가 절약되는 터임으로 결국은 전반이 전기 동력으로 변경되고 말 터이라더라.

▲ 월미도 쪽에서 촬영한 인천항 야경이다. 해안가를 따라 환한 전등불빛을 볼 수 있다. 아직 축항이 축조되기 전으로 1910년대 초중반 무렵쯤으로 보인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월미도 쪽에서 촬영한 인천항 야경이다. 해안가를 따라 환한 전등불빛을 볼 수 있다. 아직 축항이 축조되기 전으로 1910년대 초중반 무렵쯤으로 보인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이 글은 1925년 2월 27일자 매일신보의 「매갈이도 전기화(電氣化)」라는 기사 내용인데, 전기가 오히려 노동자들의 생계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봇의 등장으로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현대인들의 우려와 흡사하다. 애초 석탄 동력을 사용하던 인천항 정미소들, 매갈이간들이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생산 원가를 훨씬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가정용 수요와 정미업 동력뿐만 아니라 전기는 인천항 각종 공업, 특히 갑문 개폐 동력으로서도 절대적이었다.

 

작년 중의 전등 급(及) 전력의 수용량은 2790,050KW/h이며 전등 수용 호수는 5천5백여 호(戶)로 등수(燈數)는 2만1천 개인바 차(此)를 10촉광(燭光)으로 환산하면 3만3천여 개인데 차를 다시 1일 동안 촉광으로 환산하면 1억 2천247만9천여 촉광이란 놀라울 숫자를 시(示)한다. 다음에 전력 이용 상황을 견(見)하면 정미(精米) 모터 36대, 895마력(馬力)을 필두로 축항 갑문 개폐에 176마력, 기타 각종 공업 12종을 합하면 모터 82대에 대한 마력 수는 1328마력인바 연중무휴로 작업을 계속한다 하면 1년 중의 인천의 전동력 이용은 4만8천여 두(頭)의 마필(馬匹)을 1일의 사용함에 필적하다.

▲ 서울 노량진 수원지에서 보내온 수돗물을 다시 시내 각 가정에 송수(送水)하기 위해 설치한 배수시설로 1908년 송현동에 설치되었다. 송림산이란 이름을 가졌던 이 일대가 수도국산(水道局山)으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오른쪽 위에 흰 원형 시설은 제수변실(制水弁室)로 단수와 수압을 조절하는 밸브실이다. 현재 인천시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서울 노량진 수원지에서 보내온 수돗물을 다시 시내 각 가정에 송수(送水)하기 위해 설치한 배수시설로 1908년 송현동에 설치되었다. 송림산이란 이름을 가졌던 이 일대가 수도국산(水道局山)으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오른쪽 위에 흰 원형 시설은 제수변실(制水弁室)로 단수와 수압을 조절하는 밸브실이다. 현재 인천시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사진제공=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이 역시 1924년 5월 18일자 매일신보의 『인천과 전기』라는 기사의 일부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기가 인천항 산업 에너지로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개항이 가져다 준 또 다른 서구 문명의 세례는 수도였다. 우리보다 일찍 서구 문명에 눈을 뜬 일본인들의 위생상 요구와 군사용 음용수(飮用水) 확보를 의식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1906년 탁지부에 수도국을 설치하여 수도공사에 착수한 이래, 1910년 10월에 노량진 수원지로부터 인천지역 통수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급수 통계를 보면 초기에는 전적으로 일본인 위주였고 한국인 거주 지역은 안중에 없었던 것 같다.”는 신태범 박사의 증언 그대로, 수도 역시 일본인 가정 위주여서 1912년 말 현재 인천의 전체 조선인 가구 중 28%만 혜택을 받았고 나머지는 역시 우물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1928년 4월 19일자 중외일보는 이 점에 대해 매우 강한 어조로 유감을 표하기도 한다. 이 수도보급 비율은 1931년 마지막으로 수도설비 확장계획을 세웠다가 광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실제 개항이 되고 각국인들의 거주와, 특히 일인들의 이주가 크게 늘어나면서 물의 부족과 오염, 질병 등의 문제가 대두되었을 뿐이지, 그 전까지는 야트막한 산과 구릉이 많은 인천항은 물에 관한 한 그다지 큰 문제가 없었다.

▲ 1924년 5월 18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직접 송전 받고 있는 인천의 전기 사정을 조사한 내용이다. 전기 수용 가구 5천5백여 호(戶)로 등수(燈數) 2만1천 등을 촉광으로 나누면 1일 1억 2천만 촉광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끈다. /사진제공=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24년 5월 18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직접 송전 받고 있는 인천의 전기 사정을 조사한 내용이다. 전기 수용 가구 5천5백여 호(戶)로 등수(燈數) 2만1천 등을 촉광으로 나누면 1일 1억 2천만 촉광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끈다. /사진제공=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조선인 가구에 대한 수돗물 공급 차별을 지적하는 1928년 4월 19일자 중외일보 기사이다. 상수도 보급률이 총 40% 이상이나 이것을 국적별로 보면 일본인은 90% 이상, 기타 외국인은 60% 이상 상수도 혜택을 받으나 조선인은 30% 미만이라는 항의성 내용이다./사진제공=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조선인 가구에 대한 수돗물 공급 차별을 지적하는 1928년 4월 19일자 중외일보 기사이다. 상수도 보급률이 총 40% 이상이나 이것을 국적별로 보면 일본인은 90% 이상, 기타 외국인은 60% 이상 상수도 혜택을 받으나 조선인은 30% 미만이라는 항의성 내용이다./사진제공=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특히 중구 지역은 응봉산이 수원지 노릇을 해서 전동과 내동, 인현동 일대에 수량이 풍부한 우물들이 있었고 관동, 북성동, 송월동 지역에도 필요한 만큼의 우물이 있었다. 율목동 쪽 역시 옛 시립도서관 언덕 아래 우물이 충분했고, 싸리재 밑 '용동큰우물'은 원인천지역 수원(水源)의 대명사였다. 이 일대에 즐비했던 양조장들을 보아도 그런 사실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수도 사업을 서두른 것은 개화 도시로서 위생적인 민간 음용수 조달 목적 외에도 인천이 국제항이자 서해안 중요 어업 전진기지로서 선박 급수의 필요성, 그리고 저들의 군사기지로서 군의 보급과 식수 공급이 절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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