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평화연구원 특집]6·25 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 진상 조사 확대해야
[인천일보 평화연구원 특집]6·25 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 진상 조사 확대해야
  • 정찬흥
  • 승인 2021.01.06 17:37
  • 수정 2021.01.06 17:37
  • 2021.01.07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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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위원회 2005년 5월 제정된
'과거사정리법' 출범한 이후
4년2개월간 1만1172건 사건 조사

작년 6월 과거사정리법 개정안
2기 위원회 작년 12월 출범
3년간 활동…1년간 연장 가능

6·25 전쟁 피해 사건별 보고서

1·4 후퇴 전후 '강화향토방위특공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집단 살해

민간인 희생 막는 최소한 조치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
▲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시가지에 포화를 퍼붓고 있는 유엔군의 작전 상황을 항공기에서 촬영한 장면이다. /사진제공=인천시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지난해 12월 10일 출범했다. 위원장은 정근식 서울대교수가 맡았으며, 국회가 추천하는 위원 8명도 선임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6월 9일 개정 공포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정리법)'에 따라 출범한 제2기 위원회는 앞으로 3년간 조사활동을 벌일 예정이며 1년간 연장이 가능하다.

 

-제1기 위원회의 성과와 한계

진실화해위는 항일독립운동과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설립한 국가기구다.

제1기 위원회는 2005년 5월 제정된 '과거사정리법'에 의해 출범한 이후, 2010년 6월 30일까지 4년 2개월간 1만1172건의 사건을 조사해 그해 12월 종합보고서를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한 뒤 12월 31일 해산했다.

특히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8206건에 대한 조사를 벌여 이중 6742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기구나 학계에서 밝혀내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발굴하고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1기 위원회 활동은 법으로 정해진 신청기간이 짧았고 국민적 홍보가 부족해 위원회의 존재를 몰랐던 피해자들이 신청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됐다. 또한 위원회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피해자의 경우에도 수십 년간 겪어온 연좌제와 트라우마,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과 공포로 인해 신청하지 못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제2기 위원회의 과제

인천지역에서 발생한 6건의 6.25 전후 민간인 학살 및 폭격피해 사건 조사에서도 780여 명의 피해자 신원을 밝혀냈으나, 실제 발생한 사건과 피해자 규모는 이를 크게 웃돈다는 것이 이 분야 연구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1기 위원회 조사활동에 참여했던 최태육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은 “6.25전쟁과 인천상륙작전 과정에서 자행된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군경의 민간인 학살 등으로 희생된 민간인이 최대 1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와 정치권은 1기 위원회 활동을 통해 밝혀내지 못했던 과거 사건과 피해자 추가 발굴, 진상규명 및 보상 등을 위해, 지난해 6월 과거사정리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2기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2기 위원회 출범 이후 한 달여 남짓 기간 중 접수된 사건은 모두 703건(1월 5일 현재)에 이르며, 인천과 경기도에서는 각각 6건, 23건 등이 제출됐다.

지난해 11월 25일에는 인천지역 민간인 피해 추가 진상조사를 추진할 '한국전쟁 인천유족회 설립 준비모임'이 열리기도 했다.

▲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일인 2020년 9월15일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을 찾은 관광객들이 상륙작전 당시 상황을 묘사한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인천일보DB
▲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일인 2020년 9월15일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을 찾은 관광객들이 상륙작전 당시 상황을 묘사한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인천일보DB

# 인천지역 6.25 전쟁 민간인 피해사건

진실화해위 제2기의 본격적 조사활동에 앞서, 1기 위원회 조사에서 밝혀진 6건의 '6.25 전쟁 기간 중 인천지역 민간인 학살과 미군 폭격사건 피해사건'을 '사건별 조사보고서'를 통해 살펴본다. 보고서 전문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jinsil.go.kr/jinsil/)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화도·석모도·주문도 민간인 희생 사건

1951년 1·4 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한국군과 미군, 강화경찰서 등의 지원을 받은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강화지역에서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사건이다.

윤 모 씨 등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39명을 포함한 430여 명 이상의 강화지역 민간인들이 1951년 1·4 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특공대 본거지인 강화경찰서와 면지서 등으로 연행·구금돼 고문을 당한 뒤 갑곶나루, 옥림리 갯벌, 월곶포구, 돌모루포구, 철산포구, 온수리 사슬재, 선원 대문고개,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 등지로 끌려가 집단 학살됐다.

이는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한국전쟁기간 중 북한 점령 시기의 부역자는 물론 부역혐의자와 그들의 가족이 북한 재점령 시 북한에 협조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무차별 살상한 것이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39명 중 여성이 42명으로 30%, 10대 미만이 14명으로 10%를 각각 차지했다. 특히 삼산면(석모도),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 희생 사건의 경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17가족 53명이 집단으로 살해됐다.

 

-강화 교동도 민간인 희생사건

1·4 후퇴 이후 강화 교동도 민간인 183명이 한국군과 미군의 통제 하에 있던 교동 주둔 유엔군 유격대(UN Partisan Forces)에 의해 부역혐의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된 사건이다.

강화군 교동 주민 황 모 씨 등 183명은 1·4 후퇴 이후 교동도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유엔군 유격대 소속 강화해병특공대와 해병특공대에 의해 '내응행위자'라는 확인되지 않은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상룡리 안개산, 고구리, 인사리, 난정리, 양갑리, 무학리, 지석리 해안 등지로 끌려가 집단 학살됐다.

희생자들은 남편이나 아들이 북한점령 시 부역을 하다가 피신 월북했다는 혐의를 받던 자들의 가족으로 183명 중 74.3%인 136명이 아동·노인·여성이었으며, 이중 15세 이하의 아동이 전체의 33.3%인 61명이었고, 51세 이상의 노인이 14.8%인 27명, 여성이 49%인 90명이었다.

위원회는 “아동·노인·여성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학살행위는 비무장민간인을 대상으로 의도적으로 행해진 공격행위로, ▲인도에 반한 죄(crime against humanity) ▲제네바협약에 위반되는 전쟁범죄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한 위법행위”라고 규정했다.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영흥도·덕적도·교동도)

1949년 11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서울과 인천지역 일대에서 국민보도연맹원, 요시찰인,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최소 99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다.

해군 육전대와 해군 첩보대는 1950년 8월 18일부터 9월 말경까지 덕적도와 영흥도를 정보수집의 근거지로 확보하는 과정에서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예상치 못한 작전의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최소 41명의 비무장민간인을 살해했다.

또한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1951년 1·4 후퇴를 전후해 경기도 경찰국 경찰들과 해군·해병대가 인천 거주 비무장 민간인을 인천 국민보도연맹 및 요시찰인,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예비검속·연행·구금·이송하는 과정에서 경인 군·검·경합동수사본부의 지휘 하에 인천 인근의 소월미도·팔미도·덕적도 등지로 끌고 가 최소 52명을 살해했다.

1949년 11월 4일경에는 교동면에 주둔하던 육군 방첩대 요원 5명이 교동면 주민 40여 명을 좌익혐의로 연행해 심한 고문을 가하는 과정에서 10명에게 중증 상해를 입히고 최소 1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했다.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미 해병대 소속 항공기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월미도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의 일환으로 월미도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가해 이 지역 거주 민간인들이 집단 희생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은 신원이 확인된 정 모 씨 등 10명이며, 실종됐거나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해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위원회는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하고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고도에서 주민에게 기총소사까지 한 것은 ▲국제인도법 ▲전쟁법의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민간인 구별의 원칙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 작전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쟁의 크나큰 피해를 입은 월미도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5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며 한국정부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피해보상, 귀향 및 위령사업, 명예회복 조치 등을 강구할 것을 권고했다.

 

-강화지역 적대세력 사건

1950년 7월 25일에서 10월 초 강화군 선원면을 비롯한 11개 면 주민 66명이 인민군 주둔시기와 후퇴시기에 인민군과 내무서원, 지방좌익에 의해 하점면 이강리 자택, 불은면 삼동암리 대청교, 양사면 인화리 중외산 중턱, 개성 송악산 중턱에서 희생된 사건이다.

희생자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경력과 해방 이후 사회활동 및 직업에 의해 '반동분자'로 분류되었거나 벽보·삐라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자택 혹은 동네에 게양했다는 이유로 희생당했다.

 

-적대세력에 의한 인천경찰서에서의 희생 사건

인천시 서창동 대한청년단 감찰대장 등으로 활동하던 김 모 씨 등이 한국전쟁 발발 후 내무서원들에게 붙잡혀 인천경찰서에 수감됐다가 인민군 퇴각시기에 총살당한 사건이다.

1950년 7월 3일 이후 인천을 점령한 인민군은 각 동에 인민위원회 등을 구성해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익인사들을 체포했다. 내무서원들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 퇴각 과정에서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총격을 가했으며, 이로 인해 수감자들이 사망한 사실이 문헌자료와 참고인의 진술을 통해 확인됐다.

/정찬흥 인천일보 논설위원 report6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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