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신은 자신의 발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집 밖의 길을 보며 이찬수는 현관 앞 타일 바닥에 좌아악 깔린 달빛을 밟고 그러나 달빛은 밟히지 않고 발등에 올라앉고 이찬수는 타일 바닥을 밟고 가고, 앞은 보지도 않고 앞서가는 이찬수의 등만 보고 허진숙은 현관 앞 타일 바닥에 좌아악 깔린 달빛을 밟고 그러나 달빛은 밟히지 않고 발등에 올라앉고 허진숙은 타일 바닥을 밟고 가고

사유가 시의 본령이라고 믿든 감각이 시의 본령이라고 믿든, 무슨 본질이나 의미를 믿는 독자들이라면 이 시를 보고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이미지나 관념을 드러내거나 정서나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이찬수'와 '허진숙'이 바닥에 깔린 달빛을 밟고 가는 정황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제시할 뿐이다. 그가 밝힌 바 있는 날이미지로서의 현상, 그리고 그 현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시이다. “세계의 수수께끼는 풀리는 것이 아니라, 제시된다”는 브레히트의 말처럼, 오규원은 이 세계의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제시해 줄 뿐, 어떤 의미나 결론까지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런 시적 태도는 세계 체험을 번역해 내는 언어마저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이라는 명징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현상과 본질, 의미와 무의미, 존재와 비존재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깨달음의 소산이다. 세계의 본질이나 의미는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과 현상의 사이, 말과 말 사이, 그리고 보이지 않는 침묵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인에게 본질이나 의미는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유령과 같은 것이다. 문학이나 시의 본질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본질이나 의미를 내세우고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집착이고 망상일 수 있다. 만약 오규원 시인이 그 유령에 집착한다면 이런 시가 나올 수 없으리라. 모든 것을 버릴 때 가능하다. 비움으로써 비로소 채우는 것. 그것이 삶이다. 많이 비워서 더 채울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 강동우 문학평론가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