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북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는 전 세계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신년사에 어떤 내용이 담겼느냐를 보고 북미관계, 남북관계와 동북아정세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신년사는 나오지 않았다. 작년에는 북 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 결정서로 대신했고, 올해는 조만간 진행될 8차 당대회 결정문으로 대신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평양 새해맞이 행사였다. 2013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등장한 이후 계속된 행사지만, 과연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친 올해도 계속될 것인가 관심사였다. 남쪽은 지난 67년 동안 이어져 오던 타종 등 새해맞이 행사를 취소하거나 온라인으로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평양 시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새해맞이 행사를 즐겼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실내에서도 새해맞이 행사가 열렸다.

지난달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아시아지역 코로나19 상황보고서’에 따르면 북에서 11월27일부터 12월3일까지 791명이 코로나19 감염 여부 검사를 받았으나 모두 음성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지난 10월10일 열병식 행사에 참가한 군중들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관람했다. 이번 새해맞이 행사에서도 거리두기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즐기는 모습으로 볼 때, 현재까지 북의 코로나19 확진자가 0명이라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이번에는 참가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이는 감기•독감이 유행하는 겨울철인 데다,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면서 북도 방역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강경화 외무장관은 12월5일(현지 시각) 바레인에서 열린 중동지역 다자안보 회의에 참석해 ”북한이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믿기 어렵다“면서 ”조금 이상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자 나흘 뒤인 12월9일 김여정 북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나서서 맹렬히 비난했다. 북의 비상방역 조치를 깎아내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자평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한국의 외무장관이 외국 장관들 앞에서 북의 방역 태세와 성과를 깎아내는 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몰랐을까? 그랬다면 장관 자격이 없다. 아마도 강 장관 머릿속에 북에 대한 불신이 부지불식간에 자리잡고 있어, 북의 발표는 무조건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발언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70년간 분단과 전쟁, 그리고 대결 역사 속에서 ‘북은 나쁜 놈, 거짓말을 일삼는 집단, 빨갱이 소련과 중국의 괴뢰’등의 이미지가 우리 머릿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들 상당수는 그렇게 세뇌되어 온 건지 모르겠다. 따라서 북은 온통 나쁜 것, 잘못된 것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사회로 인식되고 있다. 북은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했고, 토지개혁을 제대로 했다. 북은 동유럽과는 달리 소련의 위성국가가 아니라 코메콘 가입도 거부하면서 자주의 길을 걸었다. 중화학공업 중심 발전전략을 택하면서 1970년대 초반까지는 남보다 더 잘 살았다.

지금은 고난의 행군시절을 겪어 오면서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는 사회다. “지도자와 인민들이 일심단결되어 있는 사회”라는 등 북의 좋은 점을 얘기하면 ‘친북’이나 ‘종북’으로 의심받는 사회가 남쪽 사회이고, “북조선은 무조건 대한민국보다 못나야 하고 사회주의는 무조건 자본주의보다 열등해야 한다”라는 반공 이념의 포로가 우리였다.

새해 1월1일, 문재인 대통령은 짧은 신년사를 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 온 국민들을 향한 메시지로 “국민이 희망이고 자랑입니라”라는 말로 감사를 전했다. 아쉬움이 크다. 말미에라도 지난 2018년 9월19일 능라도 5•1경기장 연설처럼 “경제가 어려운데도 스스로 국경을 봉쇄하면서까지 코로나19 방역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북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인민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라는 말을 덧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만큼 마음이 닫혀 있고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속에서 2021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2018년 ‘평양의 봄’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서울의 가을’을 기대했건만, 현재로선 기대난망이다. 현재 지구상 모든 나라의 첫 번째 과제가 코로나19 탈출과 경제위기 극복이다. 남과 북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은 정권 이양기에 있어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협상에 나서려면 최소한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가까운 시일 내에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안타까운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끝나가기에 무엇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뭘 준다, 뭘 같이 하자는 제안 백날 해 봤자 신뢰를 잃은 상대와 마주앉을 일은 없을 것이다. 신뢰가 흔들리는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있는 그대로의 북을 인정하는 것에서 다시 대화의 문은 열린다. 자꾸만 북을 부정하고 우리보다 못나고 못사는 동생쯤으로 여기면 대화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남들 사이의 계산과 협상만 있을 뿐이다.

미국의 내정간섭 수준의 비토에도 의연히 이번에 국회에서 통과시킨 대북전단살포금지법처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풀어가면 된다. 남북정상합의 국회 비준과 함께 3월에 예정된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선언해야 한다. 이미 문재인 정부 임기 내 회수가 불가능한 전시작전권에 매달리지 말고, 코로나19 재확산 등을 이유로 조기에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선언한다면 8차 당대회를 코앞에 둔 북도 한시름 덜 수 있을 것이다. 비바람에 쓰러진 볏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농부의 심정으로 문재인 정부는 차기 정부가 제대로 결실을 맺도록 다시금 남북 간 대화의 창을 열어가고 넓혀가야 한다.

/ 이성재 인천자주평화연대추진위원회 상임대표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