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소방서 후정에는 '遠水不救近火, 遠親不如近隣'라는 석비가 있다. 원수불구근화(먼 곳의 물로 가까운 곳의 불을 끌 수 없고), 원친불여근린(멀리 있는 친척은 가까이 있는 이웃만 못하다).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는 이웃에 있는 강국 제나라의 위협에 항상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임금인 목공(穆公)은 진나라, 형나라와 친밀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으며, 아들들에도 그 두 나라 임금을 극진히 섬기라고 했다. 제나라와의 사이에 만일의 경우 불상사가 벌어지게 되면 그 두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목공의 그런 속셈을 잘 아는 이서가 말했다. “누군가 물에 빠졌을 때 멀리 월나라 사람을 불러서 구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월나라 사람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하더라도 이미 늦을 겁니다. 또 만일 집에 불이 났을 경우, 발해처럼 먼 바다에서 물을 끌어다가 끄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 데 있는 물을 가지고는 가까운 곳의 불을 끄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 노나라가 이웃 제나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진나라와 형나라가 아무리 강국이고 우리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별다른 효용을 주진 못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의 다스림은 치국의 첫 번째 덕목이었고 생명과 직결된 물 관리의 중요함은 현대사회에서 더욱 증대되고 있다.

보릿고개 있던 어린 시절 마을에 불이 나면 들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이 양동이를 들고 우물이나 개천의 물을 길어 와서 불을 끄던 기억이 선명한데, 현재는 전국에 17만1569개의 소화전이 빽빽이 설치돼 있고 119안전센터도 1069개(소방청 통계_2019년)가 설치돼 있어 화재현장과 소화전_소방차와의 물리적 거리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아졌을 뿐만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에는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옥내소화전과 화재 시 자동 방수되는 스프링클러 등 우리 주변에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물이 정말 가깝게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화재현장에서 물은 가까이 있되 활용을 못하게 되거나 소방시설이 작동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수년 전 국가산업단지 공장에서 발생한 대형화재 시 공장 바로 앞 도로변에 있는 소화전의 뚜껑 위에 대형 화물차가 주차돼 있어 결국 먼 거리의 다른 소화전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진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경우, 눈앞의 화재현장을 보고도 주정차차량으로 인해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어 수십 벌의 호스를 연결해 진압해야 했던 애타는 상황, 또한 화재 시 초기진화와 인명대피에 정말 중요한 소방시설을 간혹 오작동의 경보음이 시끄럽고 귀찮다 해 전원을 차단해놓거나 아예 고장상태로 방치한 사례도 적지 않게 적발되고 있다.

물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사용상의 거리가 먼 경우로 유사시 치명적인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 이에 각급 소방관서에서는 소화전 주변 주정차금지구역과 공동주택 소방차전용구역 설치, 소방차량 우선 신호시스템 운영, 소방통로 확보훈련, 소방시설 점검강화 등 가까이 있는 물의 신속하고 효율적 사용 즉 실질적 골든타임 확보를 위한 여러 정책을 시민과 함께 중점 추진하고 있다.

119는 시민에게 가깝게 있고 앞으로 더 가까워질 것이다. 여기에 시민의 성숙한 안전문화가 더해진다면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사용상의 거리도 더 가까워질 것이고, 이는 곧 재난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재산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긴급차량 피양의 모습이 더는 모세의 기적이라는 뉴스가 되지 않고, 당연한 안전문화로 자리매김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안경욱 경기 안산소방서장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