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松商)은 개성 상인들을 일컫는다. 개성을 중심으로 인삼을 재배하고 홍삼을 제조하는 등 실물경제에 밝은 한국의 대표적 상인집단이었다. 복식부기 창안과 독특한 금융제 실시 등을 통해 각종 상관습을 획기적으로 바꿨다는 평을 듣는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상인정신'을 잘 지킨 집단으로 종종 묘사된다. 자본을 축적해 이를 생산에 다시 투자하는 등 국내 근대 상업 부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인들이다.

개성 상인들이 상업에 전문성을 갖고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엔 고려시대 개경이 국제무역도시로 번성했던 전통이 자리한다. 그 무렵 개경엔 예성강 입구 벽란도를 거점으로 외국사신 왕래가 빈번했다. 그러니 공·사무역이 번창해 상업도시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개경 상인들을 송도상인(松商)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인천 강화 주민들이 인삼재배 전통을 이어가며, 상업에 수완을 발휘하는 점도 송도상인을 닮았다. 고려 때 원나라 침입을 피해 개성에서 강화로 천도(遷都·1232∼1270년)한 후 여러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송암(松巖) 이회림(李會林·1907∼2007)은 이런 송상을 대표했던 인물이다. '마지막 송상'으로도 불리는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일으켜 굴지의 기업으로 키웠다. 그의 호에서 읽히듯, 개성에서 나고 자라면서 송상의 전통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 후 남한(인천)에 정착해 동양화학이란 회사를 일구었다. 생전 개성에서 배운 송상의 방식과 정신을 살려 제2의 고향인 인천에서 부를 축적했다. 송암은 가고 없지만, 그가 세운 회사는 이름을 달리(OCI)해 오늘도 계속된다.

송암은 타계하기 이태 전인 2005년 6월 50여년 동안 수집한 고미술품 8450여점과 이를 소장·전시하던 송암미술관(미추홀구 학익동 소재)을 인천시에 기증했다. 오랫동안 사업의 바탕을 마련해준 인천과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송암은 1992년 학익동에 송암미술관을 지었다. 학익동 일대는 동양화학 소다회 공장를 비롯해 계열사였던 삼광유리·유니드 등이 몰려 있던 '동양화학 타운'이었다. 송암미술관은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분관으로서, 수준급 고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한다. 개인소장품 전시공간을 넘어 이젠 지역사회와 교류하면서 공공미술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송암미술관 유물 중 상당수가 위작(僞作)이란 논란을 빚는다. 송암 수집품에 가짜가 섞여 있었고,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서란 분석이다. 예술품 유통 구조 특성상 위작임을 알면서도 구입하거나, 유명 미술품에 끼워팔기식으로 흘러들어오기도 한다는 게 미술관측 설명이다. 고미술품 거래에서 진위 문제가 심각함을 알게 한다. 송암미술관 소장 유물 감정평가는 2017년부터 시작됐지만, 그 결과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하루빨리 유물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 시민들에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 공공미술관으로서의 신뢰를 더해 대중에게 유물에 관해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이문일 논설위원 ymoon58@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