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화·고무신…인천서 쓴 조선 신발 새역사

이성원 포목점원서 공장 운영
경제화 창안 … 마른신 불편 해소
접착제 만능호·만력저신발 개발

안기영, 남여 고무신 개발 원조
송림동 고무공장 … 지방재벌로

주동건, 최초 신골제조기 발명
표준화·대량생산 가능해져

김용경 수뢰정형 스케이트 고안

민수업, 나라 이익 위한 기술가
사계절 제염기 발명 소금 생산
차진애방지장치 도로 청결 노력
▲ 20세기 초반 경제화(經濟靴)를 발명해 신발 혁명을 일으킨 인천의 발명가 이성원(李盛園) 모습. 그의 경제화는 우리나라 남자고무신의 <br>​​​​​​​모본(模本)이 됨으로써 고무신 창안의 발판이 되었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20세기 초반 경제화(經濟靴)를 발명해 신발 혁명을 일으킨 인천의 발명가 이성원(李盛園) 모습. 그의 경제화는 우리나라 남자고무신의
모본(模本)이 됨으로써 고무신 창안의 발판이 되었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이성원은 경제화뿐만 아니라 부수적인 발명품도 여러 가지 창안해 내었다. 사진은 접착제와 양화목형(洋靴木型) 같은 발명품을 판매한다는<br>1930년 8월 30일자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에 실린 광고 문안이다. 이성원은 오늘날 ‘본드 풀’과 비슷한 접착제를 발명하여 미국에까지 진출, 판매했던 인물이다.<br>/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이성원은 경제화뿐만 아니라 부수적인 발명품도 여러 가지 창안해 내었다. 사진은 접착제와 양화목형(洋靴木型) 같은 발명품을 판매한다는
1930년 8월 30일자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에 실린 광고 문안이다. 이성원은 오늘날 ‘본드 풀’과 비슷한 접착제를
발명하여 미국에까지 진출, 판매했던 인물이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지자요수(知者樂水)는 공자(孔子)의 말씀이되, 인천이 낳은 논어 연구가 이우재(李愚才, 1957~ )는 “물이 항상 변화하고 움직이면서도 두루 흘러 막힘이 없는 모습이, 마치 지혜로운 자가 사물의 변화와 사리의 막힌 곳 속에서, 그 궁극의 도리를 찾아내고, 사리를 풀어내어, 그것을 즐기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공자 말씀의 '물'이란 강물에 가까울 듯하나, 이 넉 자를 읽을 때에 문득 인천 바다를 떠올리면서 인천의 지혜로운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인천에 깊은 산이 없고, 그 때문에 거기서 발원하는 큰 강과 내가 없는 이유이겠지만, 그 대신 인천에는 넓게 열린 바다가 있어, 그 물결처럼 '두루 흘러 막힘이 없는' 지혜를 발휘했던 발명가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우선 꼽을 사람이 경제화(經濟靴)를 창안한 이성원(李盛園)이다. 이 경제화가 곧이어 출현한 우리나라 남자 고무신의 모본(模本)이 되었다면 그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 공헌을 했던 것인가.

이 지면에 이성원의 일대(一代)를 모조리 다 기록할 수는 없는 대로, 그가 아홉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고향 수원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인물이라는 사실과 인천일어학교와 한문서당을 중도에 그만두고 5, 6년간 포목상 점원을 지내다가 운송점과 목기공장(木器工場)을 경영했다는 사실만은 적는다.

그 후 그가 발명에 눈을 돌린 것은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야심 때문이었다. 그 야심은 '생활 속에서 제일 긴요한 것을 만들어 파는' 공업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착안한 것이 조선 마른신의 불편함과 비경제성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경제화는 그의 발명 정신의 결과로 1904·1905년경에 탄생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부터는 인천시내에 '경제화'가 처음으로 신안(新案)의 발명을 득하야 차(此)가 유행되자 이 '경제화'가 지금에는 조선 방방곡곡에 보급되야 빈약하던 재래의 조선화(朝鮮靴)의 일대 혁명을 일으키엇슴은 누구던지 주지하는 바이나 이와 갓치 혁명을 일으키어 조선화계(朝鮮靴界)에 공헌함은 인천의 숨은 발명가 이성원 군이다. 유행은 시기를 따름으로 군은 경제화의 유행의 쇠퇴됨을 기선(機先)하야 수년 전부터 다시 연구에 부심이든바 최근에는 '삼성화(三成靴)'란 신화(新靴)를 새로 발명하야 '경제화' 유행에 떠지지 안는 세력으로 전선(全鮮)에 보급하야 석일(昔日)의 경제화 용어(用語)가 '삼성화'로 교대된 감이 잇게 되얏다.

1925년 4월17일 매일신보 기사이다. 이성원을 일약 '조선화계'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이성원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특이한 발명 신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밑창을 개량한 만력저(萬力底) 신발과 오늘날의 '본드 풀' 같은 접착제 만능호(萬能糊)가 대표적이다. 이 만능호는 1930년 5월 하순 그가 직접 미국에까지 가서 판매 홍보를 할 정도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 안기영(安基榮)은 이성원의 경제화를 바탕으로 남자고무신과 또 새로운 여자고무신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서민 신발 혁신의 주인공이 되었다. 원내 인물이 30대 중반의 안기영 사장이고, 건물은 그가 송림동에 세운 인천고무공업사 공장이다. 1933년 10월 8일 매일신보 기사/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안기영(安基榮)은 이성원의 경제화를 바탕으로 남자고무신과 또 새로운 여자고무신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서민 신발 혁신의 주인공이 되었다. 원내 인물이 30대 중반의 안기영 사장이고, 건물은 그가 송림동에 세운 인천고무공업사 공장이다. 1933년 10월 8일 매일신보 기사/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37년 1월1일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에 실린 안기영의 광고 문안이다. 그는 이 무렵 인천부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37년 1월1일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에 실린 안기영의 광고 문안이다. 그는 이 무렵 인천부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두 번째 인물 안기영(安基榮)은 바로 이성원의 경제화로써 남자 고무신을 탄생케 한 주인공이다. 1913년경 열여섯의 나이로 인천에 이주한 그는 용동 큰우물거리에서 식료품가게를 벌이고 있다가, 우연히 일본 고베(神戶)에서 온 고무공장 주인을 만나 고무신에 일생을 걸게 되는데. 신발 개량이라는 번개 같은 착상으로 그 일본인에게 마른신 한 켤레와 삼성태의 경제화 한 켤레를 견본으로 주어 남녀 고무신을 만들어 내어 일약 고무신의 원조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안기영이 기민한 착상과 상재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정교한 마른신의 전통 기술과 삼성태가 경제화를 개발한 발명 정신이 없었던들 고무신이란 신발 혁명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태범 박사는 『인천 한 세기』에서 이렇게 이성원과 안기영의 공로를 새긴다. 안기영은 후일 송림동에 고무공장을 세우고 스스로 고무신을 제조해 전국에 판매하여 지방재벌로서 자리를 굳히다가 광복 후 서울로 이주했다.

▲ 신골제조기를 발명한 주동건(朱東健)이다. 이성원과 협력하여 신골제조기를 고안해 내어 개량화, 경제화 양산(量産)을 촉진한 공로자이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신골제조기를 발명한 주동건(朱東健)이다. 이성원과 협력하여 신골제조기를 고안해 내어 개량화, 경제화 양산(量産)을 촉진한 공로자이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신골제조기를 시험해 보이고 있는 주동건./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신골제조기를 시험해 보이고 있는 주동건./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또 한 사람 우리나라 최초로 '신골제조기'를 발명한 주동건(朱東健)이 있다. 신골은 신을 만들 때 필요한 화본(靴本)이다. 신골제조기는 신발의 표준화와 양산을 촉진했다. 그는 1912년 합순태(合順泰)라는 별도의 개량화(改良靴) 제조업소 주인으로 있다가 1926년 이성원과 협력하여 '신골제조기'를 발명한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하루에 하나를 깎던 것을 수백 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주동건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배재학당과 YMCA 부설 사진과(寫眞科)를 나왔다. 그는 배재학당 재학 중에 이미 개량화에 대해 투득(透得)했다고 한다.

인천의 발명인 계보에는 송현동 출신 민수업(閔守業)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제 말,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잠수함 건조에 참여했던 기술인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후에 '사계절 제염기(製鹽機)'를 발명했는데, 그 의도가 자못 감동스럽다.

그는 춘하추동 사계절, 밤낮으로 계속 제염작업을 할 수 있는 풍력발동기(風力發動機) 사용 염전을 신설하기 위해서였다. 삼면이 바다임에도 소금을 수입에 의존하는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인천 사람이었으니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발명심은 멈추지 않아 '자동차 진애(塵埃) 방지장치'도 고안했다. 자동차 네 바퀴에 이 기계를 장치하면 아무리 먼지 많은 길을 가더라도 펌프 작용을 통해 먼지를 전부 흡수하는 원리로 거리를 깨끗하게 하자는 의도였다.

▲ 16세  김용경-빙상·수상 겸용 스케이트 '수뢰정형'
▲ 16세 김용경-빙상·수상 겸용 스케이트 '수뢰정형'

마지막 소개할 사람이 1933년, 중구 유동에 살던 당시 불과 16세 소년 김용경(金龍卿)이라는 전보배달부로서 일명 '수뢰정형(水雷艇形) 스케이트'라는 독특한 발명품을 고안해 내었다. 사진에서 보듯 모양이 마치 수뢰정(水雷艇) 형태여서 이름을 이렇게 붙인 것인데, 빙설(氷雪) 위에서나 물 위에서나 조작 방법만 약간 바꾸면 항행이 자유로운 겸용 스케이트였다.

한국 신발 역사를 새로 쓴 생활필수품 신발의 창안이나 기계의 발명, 그리고 사계절 제염기와 수뢰정형 스케트 같은 기상천외의 발명은 다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 지혜의 특징이었을 것이다. 늘 바다를 향해 넓게 열려 있어, 그 끊임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두루 흘러 막힘이 없는 인천항에는 참신한 생활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곳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