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갯벌과 섬, 비무장지대와 한강하구 중립수역, 그리고 백두대간. 한반도 3대 생태축이다. 수천의 섬을 품은 서해안 갯벌은 세계 5대 갯벌로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있다.

비무장지대와 한강하구 중립수역은 사람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아 야생의 천국이 되었다. 위의 두 생태축이 인천경기만에서 교차한다. 즉 인천경기만지역은 한반도 자연생태의 핵심이다.

인천경기만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갯벌이 발달되어 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열린 하구로 갯벌의 역동성, 건강성, 다양성, 생산성이 단연 세계 최고다. 그런 갯벌이 매립으로 많이 사라졌다. 인천부사(仁川府史), 인천향토지 등에 개항 이후 인천해안 매립이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다. 김용하 인천도시연구소장은 2019년 '인천의 간척과 도시개발'에서 갯벌 매립의 과정을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다.

근대 갯벌 매립은 1897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 부설에서 찾을 수 있다. 경인철도 출입지인 인천역 정차장이 바로 갯벌이었다.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주변 지역이 유원지로 매립되었고 이 과정에서 묘도(猫島)가 사라졌다. 지금의 항동1가와 2가, 해안동, 사동, 신생동 일대도 갯벌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인천내항 1부두가 갑문식 선거로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는 만주전쟁을 위한 군수공장 용지확보를 위해 북성동, 학익동 해안을 매립했다. 해방 후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수출5, 6공단과 현재의 인천항 갑문과 1~8부두가 갯벌 매립으로 만들어졌다.

1980년대에는 민간기업이 참여하는 대규모 간척사업이 추진되었고 인천에서는 동아건설이 김포매립지를 만들었다. 동아매립지라고도 불린 김포매립지의 절반은 1991년 수도권매립지가 되었고 나머지는 2003년 청라경제자유구역이 되었다.

김포매립지는 1984년까지 두루미도래지 갯벌로 천연기념물 제257호였다. 1990년대에도 갯벌 매립은 계속되었다. 1992년부터는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영종도, 용유도, 신불도와 삼목도 사이의 갯벌이 매립되었다. 송도 앞바다에 LNG 생산기지가 만들어졌고 송도신도시 건설을 위한 대규모 갯벌 매립이 시작되었다.

섬에서도 크고 작은 갯벌 매립이 있었다. 강화도와 교동도에서는 이미 고려와 조선시대에 대규모 간척이 진행되었다. 비교적 최근 강화에서는 사기리 동주농장을 비롯하여 선두리, 동막리와 여차리, 외포리와 내리의 갯벌이 농경지가 되었다. 옹진군에서도 덕적도 서포2리 논, 백령도 진촌지구, 영흥도 화력발전소 부지, 연평도 연평항이 만들어지면서 갯벌이 사라졌다.

2000년 갯벌보호헌장이 채택되었지만 갯벌 매립은 계속되고 있다. 아암물류단지가 된 남항 1∼3투기장, 청라투기장, 청라2지구투기장, 북항준설토투기장은 모두 갯벌 위에 만들어졌다.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영종도준설토투기장은 붉은 염생식물이 장관을 이루던 갯벌이었고 건너편으로도 4㎢가 넘는 제2투기장이 갯벌 위에 조성되고 있다. 송도신항과 송도신도시 사이 갯벌 6㎢도 항만배후부지로 매립 예정이다.

인천의 역사는 갯벌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화군과 옹진군을 제외한 인천광역시 면적의 약 40%는 매립지이다. 해안선의 99.9%는 인공이다.

국가기간산업을 위해, 국가경제 성장을 위해, 인천도시 확장을 이유로 갯벌을 매립했다. 인천은 그렇게 대한민국 3번째 도시가 되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깃들었던 갯벌은 매립되어 항만과 공장이 그리고 신도시 아파트가 솟았다.

한때 인구 300만이 목표였고 달성하기도 했었다. 도시가 확장되고 교통이 편리해져 더 많은 아파트가 생기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도시의 품격이 올라갈까? 명품도시든 동북아경제 중심이든 살고 싶은 도시든 이제는 양보다 질적 성장에서, 인천다움에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장정구 인천녹색연합 정책위원장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