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백발이 되었다
머릿속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리 위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서
머릿속엔 아직 눈이 내리다 보다
눈보라가 몰아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나 보다
보이지 않으면 좋다
아무 데로나 가도 상관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면
찍힌 발자국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이제 나는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거기서 뒤돌아본 강 위론 아직 눈이 내리는 듯하고
이제 저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가끔 눈부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 백지를 보여준다
내가 쓴 거라고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졌다고
문학과 사회 2015년 겨울호 /황유원
▶ 때론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릿속은 하얗게 눈이 내린다. 눈보라가 몰아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지 않으면 좋다”고 시인은 말한다. “찍힌 발자국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이제 다른 땅 위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 길을 다 지우고 이제 새로운 길이 펼쳐질 것이다. 폭설에 세계는 백지가 되었다. 그 백지는 가끔 눈부시다.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진 것일까. 찍한 발자국 다 사라질 때까지 눈보라는 몰아쳐야 한다. 눈부신 백지가 보고 싶은 것이다.
/권경아 문학평론가 column@incheonilbo.com
저작권자 © 인천일보-수도권 지역신문 열독률 1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