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됨에 따라 화도진은 불타 없어지고,… 1988년에 화도진도를 기본으로 복원했다.…” 인천시 지정기념물 제2호(1990년 11월)인 화도진(花島鎭) 안내판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화도진이 없어졌다가 복원되기까지 구체적 설명이 없어 아쉽다. 화도진은 조선 말 외세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려는 의지로 탄생한 '상징물'이어서 더 그렇다. 일본의 외압과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인천항을 개항했지만, 그 전에 화도진은 호국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최소한의 주권을 지키려 몸부림쳤던 조선의 처절함이 서려 있는 장소다.

화도진 설치 전 일본 군함 피격으로 영종진이 파괴되는 등 이미 외침에 시달리던 조선은 서해안 관문이자 한양의 길목인 인천 연안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당시 서울로 가는 배는 모두 인천을 거쳐야 해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지금의 동구 화수동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포대를 설치하도록 명했다. 고종 15년(1878년)의 일이다. 결국 이듬해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화도진을 세웠다. 진(鎭)은 지방의 군사를 관리하던 지방 관제의 하나. 보통 진영(鎭營)을 줄여 부른다. 화도진을 구축한 지 몇년 지나지 않아 갑오개혁(1894년)에 따른 군제 개혁으로 진은 철폐되고 건물도 없어졌다.

현재의 화도진은 1988년 화도진도를 기본으로 복원했다. 통상수령 등이 정무를 집행했던 동헌을 비롯해 안채와 사랑채 등이 자리한다. 안채엔 보료·반짇고리·버선장·3층장 등 각종 유물을 진열하고, 대청마루엔 찬장·쌀뒤주·장탁자 등을 마련해 당시 생활모습을 재현했다. 전시관으로 개조된 행랑채에선 무기류·집기류 등 군사 장비를 보여준다. 화도진엔 70~80명의 병사가 주둔했다.

화도(花島)란 지명은 어떻게 나왔을까. 먼저 지형이 꽃과 같다거나 꽃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란 설이 전해진다. 여기에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서 '곶마을'로, 다시 이것이 '꽃마을'로 변하고 다시 한자화하면서 '화도'로 변천했다고 본다. 화수동(花水洞) 역시 화도진 설치 후 유래한 지명이다. 1936년 일본식 지명인 화수정(花水町)이었다가 1947년 화수동으로 개칭됐다.

그런데 화도진공원 옆 본디 화도진 터가 '화수화평 재개발 구역'에 속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본보 취재 결과 이미 주택들이 들어섰지만, 그나마 공원으로 이어진 화도진 터는 지형도 알아볼 수 없는 '아파트 숲'으로 개발될 처지라고 한다. 시의 '도시정비사업 추진 현황(8월 말 기준)' 자료를 보면, 조합 설립 단계인 화수화평 구역 면적은 축구장 26개 크기인 18만998㎡에 이른다. 드넓은 재개발 부지엔 화도진 터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공설목욕탕, 조선기계제작소·일본차량(인천공작창) 공장 사택 등도 포함된다. 가뜩이나 인천의 근대문화유산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터다. 인천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 '화도진'을 제대로 살려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