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은 오간데 없지만 의병정신은 면면히 남아

무관 집안 풍천임씨 후예로 양지군서 출생
외교권 상실에 자결한 이한응 열사와 동향

1907년 광무황제 퇴위·군대해산 잇따르자
농상공학교 교관 재임 중 벼슬 버리고 거의
8~9월 이천의진 좌익장으로 의병투쟁
용인 일대서 일본군경과 수십 차례 교전
22일 전력 차 밀려 굴암서 대패…의진 해산

후일 도모 중 11월10일 피체돼 이틀 뒤 피살
시신 못 찾아…정부,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의병장 옥여 임경재상(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 의병장 옥여 임경재상(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 용인 용덕사(옛 굴암사) 산신각 쪽에서 바라본 임옥여 의진 전적지.
▲ 용인 용덕사(옛 굴암사) 산신각 쪽에서 바라본 임옥여 의진 전적지.

 

◆ 광무황제 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발, 거의하다

을사늑약에 이어 광무황제가 퇴위당하고, 군대해산으로 이어지자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용인은 이천, 지평과 함께 경기도에서 반일의병투쟁의 선봉지역이었는데, 당시 이천에 살던 김봉기(金鳳基), 용인에 살던 임옥여(任玉汝)·정주원(鄭周源) 등은 대표적인 경기도 중남부지역 후기의병장이다.

임옥여(1872~1907)는 양지군 주동면 평촌동(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출신으로 본명은 경재(景宰)이고, 누대로 무관장(武官將)을 지냈던 풍천임씨의 후예이다.

▶ 김영진을 중추원 의관에 임용하고, 임경재(任景宰)를 농상공부 주사에 임용하였다. ( <승정원일기>. 1902년 8월 26일·양력 9월 27일)

▶ 임경재(任景宰), 유제달, 민병승, 정헌교, 한태원, 이제붕, 민인호, 유기준, 문명진, 박윤영, 한길수, 최홍순을 외국어학교 부교관(副敎官)에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1905년 12월 28일·양력 1906년 1월 22일)

▶ 외국어학교 부교관 임경재(任璟宰)를 농상공학교 교관에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1906년 윤4월 9일·양력 5월 31일)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그의 관직은 농상공부 주사, 외국어학교 부교관을 거쳐 농상공학교 교관으로 있었는데, 그 이후 벼슬을 내놓고 거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피체되어 심문을 받은 내용 중에 의진의 장령에 대한 것이 드러나 있으나 거의하게 된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누대로 장신가 집안인 데다가 동향인 이한응(1874~1905) 열사의 자결 순국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한응 열사는 1901년에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런던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03년 10월22일 6품에서 정3품 통정대부로 승차한 후 주영서리공사로 활동하던 1905년 5월12일, 한일의정서(1904. 2. 23.)로 인해 대한제국의 주영공사관 철폐를 통보받게 되자 외교권이 상실된 것에 항의하여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광무황제는 이한응 열사의 충절을 기려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으로 증직하고, 선친 이경호(李璟鎬)와 함께 장충단((獎忠壇)에 제향하게 하였다.

이한응 열사는 1900년 시종원 시종, 1901년 외국어학교 부교관을 거쳤다. 동향인 임옥여 의병장은 이한응 열사보다 두 살 많았으나 외국어학교 부교관 생활은 후임이었다.

▲ 일제의 <폭도사편집자료>에 있는 임옥여 의병장의 의병투쟁 기록(3쪽을 필자가 편집함).
▲ 일제의 <폭도사편집자료>에 있는 임옥여 의병장의 의병투쟁 기록(3쪽을 필자가 편집함).

◆ 이천의진 좌익장으로 의병투쟁

1907년 8월 중순 임옥여는 동지를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경기도 이천군 신면(新面) 남정동(南井洞) 이근풍(李根豊)의 집에서 김봉기(金鳳基), 주창용(朱昌龍) 등과 이천의진을 조직하고, 그 의진의 좌익장을 맡았다.

이천의진 도총대장에는 이근풍이 맡았다가 뒤에 김봉기가 추대된 까닭이 김봉기의 판결문에 그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임옥여의 공술에 의하여 제기한 검사의 공소 중에 지난해 음력 7월경에 동군 이근풍 집에서 피고와 주창룡(朱昌龍)·신규희(申奎熙)·조상현(趙常顯)·임옥여가 모여서 포군(砲軍:산포수-필자 주) 32명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제하는데, 이근풍은 도총대장, 주창룡은 군사(軍師), 임옥여는 좌익장, 신규희는 우익장, 피고는 진찰장(陣察將), 조상현은 향관(餉官)이 되어 광주군 도현(都峴)에 도착하였더니, 이근풍이 모든 사람과 의견이 맞지 않아 부하에게 피살될까 하여 도주하였으므로, 다시 피고를 대장으로 삼고 장두지(障頭地:노루목)에 이르러 조반을 먹고 이천읍에서 일본 기병과 교전하여 이를 격퇴하였다고 한 그 사실은 경기 경무서에서 청취한 임옥여의 공술에 의하여 명백하므로 다시 심리를 행한즉, 피고가 지난해 음력 7월에 이근풍이 대장이 되고 피고는 종사(從事)가 되었다가 그가 도주한 뒤에 포군 무리들이 피고를 추대하여 대장을 삼아 이어 중인(衆人)을 거느리고 양근 앙덕리(仰德里)로 갔으니, 피고의 공술 중 이 대목에는 자세한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123쪽)

김봉기의 판결문에 주요 장령이 드러나고 있는데, 처음에는 산포수 32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킨 후 점차 의병모집을 하면서 의병투쟁을 펼쳐나갔음이 일제의 기록에 나타나 있다.

▶ 융희 원년 8월 15일 오후 2시.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전봉기(全鳳基:김봉기 오기-필자 주)의 부하 80여 명이 음죽군(陰竹郡:현 장호원읍·설성면·율면 등지-필자 주) 순사 분파소를 습격하여 순검 3명을 격퇴하고, 가옥·기물을 파괴하였다.

▶ 융희 원년 8월 22일 오전 10시.

수괴 임옥여의 부하 약 20명이 이천 읍내를 습격하여 우편취급소 및 때마침 출장 부재중의 순사분파소를 파괴하고 순사의 의류, 기타 도구를 약탈하여 돌아갔다.

▶ 융희 원년 8월 30일 오전 8시.

전선 수리를 위하여 이천에 출장 중인 니카무라(中村) 소대장 이하 병졸 50명은 수괴 불명의 폭도(의병-필자 주) 50명과 충돌, 교전 3시간 만에 이를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적(賊:의병-필자 주)의 사망자는 8명이며, 우리 편의 사상자는 없다.

▶ 융희 2년 9월 14일 오전 7시.

보좌관보(補佐官補) 사카모토(酒本勇四郞) 이하 순사 8명은 정찰을 강행하던 중, 죽산군 백암시장에 모인 약 250명의 적도(賊徒:의병-필자 주)를 발견하고 돌격하자 사체 3구를 유기하고 퇴각하였다. 우리 편의 손해는 없었다.

▶ 융희 원년 9월 22일.

보좌관보 사카모토 이하 보조원 4명은 나카하라(中原) 정찰대와 함께 굴암(屈巖)에 있는 폭도 200여 명을 공격하여 적의 척후 9명을 전멸시키고 적의 진지에 돌입하였다. 적은 급격한 돌격에 극도로 낭패하여 시체 5구를 유기하고 죽산·안성 방면으로 궤주(潰走)하였다. 한편, 추격을 계속하여 적의 의지했던 부락을 불태우고 격전 수시간, 적은 사망자 15구를 유기하고 궤주하였다. 그날 오후 4시 수괴 전봉기(全鳳基:김봉기 오기-필자 주)의 부하 약 200명이 여주 읍내를 습격하여 동장(洞長) 노만실(盧萬室)을 살해하고 돌아갔다.

▶ 융희 원년 9월 28일 오전 7시.

전봉기(全鳳基:김봉기 오기-필자 주) 및 한성관(韓聖寬)의 부하 약 250명이 여주 읍내에 내습, 당시 타나베(田邊) 대위가 인솔하는 150명의 군대는 전날 밤부터 숙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세 방면으로 전개 포위공격을 시작하여 적은 시체 6구을 유기하고 궤란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17~519쪽 참조)

<독립운동사자료집> 3집에는 이천의진의 의병투쟁으로 추정되는 수십 차례의 기록 중, 주요 내용만 정리하였다. 이천의진이 본대, 좌·우익 부대 등으로 나눠 활동하기도 하고,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그 인원수에 있어서 차이가 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화승총이나 엽총으로 무장한 의병을 진압을 위해 군경합동으로 작전을 전개하기도 했고,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육군 대위가 150여명을 이끌기도 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천의진은 원주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접전하고, 광주·양근 등지에서 일본군경을 연파하기도 하였다. 임옥여 의병장은 정주원 의진과 연합하여 양지, 죽산, 음죽, 용인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였고, 김봉기 의병장이 이끌던 이천의진 본대와는 광주, 이천, 여주 등지에서 합동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9월22일 굴암(屈巖) 일대에서 서울 용산에서 파견된 일본군 150여명과 격전을 치렀는데,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하는 바람에 마침내 의진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김봉기 의병장 판결문 속의 임옥여 의병장의 행적.
▲ 김봉기 의병장 판결문 속의 임옥여 의병장의 행적.

◆ 피체되어 피살, 순국하다

이천의진 본대를 이끌던 김봉기는 피체되어 평리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고, 융희황제의 재가에 의해 순국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데, 여기에 의병을 일으킨 이유가 나타나 있다.

“법부에서, 피고 김봉기(金鳳基)의 공초(供招)에, '우리 황상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뒤에 저는 일인(日人)들의 압박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국민의 의무로서 멸망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현 정부의 대신 무리가 일본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는 죄행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의병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스스로 초모관(招募官)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정부의 여러 역적들을 규탄하는 격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각국 영사에게 보내는 글, 동포들에게 널리 알리는 글들을 신문에 싣게 하려다가 결국 싣지 못하고 모두 중부경찰서에 압수당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경찰부에서 받은 임옥여(任玉汝)의 공초에는 피고가 대장이 되어 일본 기병과 이천군에서 싸워서 격퇴하였다고 하니, 그 사실에 대하여 그가 비록 자복(自服)하지 않았지만 이미 대장이 되었으니 변란을 일으킨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908. 5. 19.)

임옥여 의병장은 의진을 해산하고 귀가하여 후사를 도모하던 중, 그해 11월10일 용인 헌병분견소 헌병대에 피체되어 수원수비대로 압송된 후 신문(訊問)을 당하고 피살되었다고 전하는데, 당시 기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 포살의괴(砲殺義魁)

지난 12일에 광주수비대에셔 임옥여(任玉汝) 등 3명을 체포하야 신문(訊問)하고 포살(砲殺)하얏다더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서우> 제13호, 시사일보 10월 16일 ~ 11월 15일)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임옥여 의병장 등 3인이 피체된 것은 11월10일이고, 일본군에 의해 피살 순국한 날은 11월12일로 보이며, 안타깝게도 세 분은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였다.

정부는 임옥여 의병장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1993년 용인문화원과 풍천임씨 문중에서는 고향마을 어귀에 동상을 세워 그의 숭고한 의병정신을 기리고 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