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서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참사가 일어났다. 혼비백산한 주민들이 육지로 피난을 떠나는 등 인천은 물론, 대한민국 전체가 전쟁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수많은 국내외 미디어는 현장을 찾아 거꾸로 연평도로 향했다.

인천일보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사회부 소속이었던 나는 중견기자라는 주 이유와 미혼이라는 부차적 이유로 자의반 타의반 위험해 보이는 연평도에 들어갔다. 포격 직후엔 대중 교통이 없어 해양경찰이 제공하는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갔다. 나올 때는 군용 헬기를 타고 복귀했다. 연평도에서 복무하는 해병대 장교들이 기자들에게 부대 및 섬 내 포격 현장을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하며 설명을 해줬다.

며칠 후 여객선 운항이 재개되면서 나는 다시 연평도로 들어갔다. 섬에는 남아 있는 주민들이 거의 없었다. 기자들이 훨씬 많았다. 수백명의 기자들이 묵을 곳이 없어 인근 학교 교실에서 생활했다.

나를 비롯한 일부 운 좋은 기자들은, 용감하게 섬을 떠나지 않고 민박을 운영하던 주민들 집에서 지냈다. 첫날부터 취재를 했고, 바로 기사를 썼다. 특정 보수단체 회원들이 치안 보조 등 자원봉사를 이유로 대거 연평도에 들어와 '(***/북한의 지도자)을 처단하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섬 내부를 행진하면서 '응징 보복'과 같은 정치 구호를 외치자 일부 주민들은 "오히려 긴장감을 높여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당시 편집국장에게 전화가 왔다. "해당 보수단체 회원들이 회사로 험악한 분위기의 목소리로 전화를 해 '윤전기를 세워버리겠다'고 했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난 내심 '더 날카롭게 이들을 지켜보면서 후속 기사를 꼭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여론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아서였는지 이틀 후 그들은 돌연 연평도를 떠났다. 이 시기 연평도에는 또 다른 단체도 와 있었다.

주민 대부분이 빠져나간 뒤 방치되고 있는 연평도 내 반려동물의 열악한 현실이 알려지면서 동물보호단체가 섬을 방문해 구호활동을 폈다.

고립된 섬의 특성상 많은 주민들이 키우고 있던 개와 고양이들이 먹이를 구하지 못해 거리를 떠돌고 있는 상황에서 섬 주민들에게는 가족과 다름 없는 반려동물들을 돌봐 나중에 주인과 재회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였다. 게다가 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극도로 예민해 진 동물들이 사람이 공격을 당할 수 있는 등 더 큰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들 단체 회원들은 당시 수의사 2명과 함께 연평도에 들어와 임시보호소를 설치하고 1년 이하 어린 동물들을 돌봤으며, 연평도 곳곳을 살피면서 주인 없이 배회하는 다 자란 동물들은 일일이 집을 찾아 묶어 놓은 뒤 매일 사료를 제공했다. 이들의 보살핌이 섬 내 반려동물들을 살렸고, 시간이 지나 주인과의 재회를 가능하게 했다.

또 당시 그 곳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특별했지만, 돈이 있어도 쓸 수 없었던 기억은 여전히 강렬하게 내 머리에 남아있다. 연평도엔 식당 등 문을 연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현찰이나 카드를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연평도에서 먹고 자는 기자들은 그들이 속한 회사에서 배편을 통해 보내주는 생필품 소포를 받아 생활했다. 담배나 소주도 그렇게 조달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빵돌이인 나는 당시 섬에 있으면서 빵(햄버거와 피자 포함)을 무척 먹고 싶어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연평도에서 생활하며 매일 관공서에 들렀다. 비상시기였던 만큼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빈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서류를 봤다. 기자로서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 담긴 문서였다. 순간 본능적으로 몰래 집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훅 솟구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다만 나는 다른 기자들이 이 서류를 보지 못하게 뒤집어놨다. 그리고 담당자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취재를 했다. 다음 날 편집국장이 전화해 칭찬했다. 속으로 웃었다.

그러면서 당시 공무원에게 들은 다른 이야기도 썼다. 포격 사건 이후 경찰관, 소방관, 면사무소 및 우체국 직원 등 공무원들이 2교대로 24시간 비상근무를 서며 위험을 무릅쓰고 각종 지원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옹진군이 연평도 주민에게 지급 중인 주민 위로금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공무원이 고맙다고 했다. 나중이라도 해결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연평도에 머무르며 취재하던 나는 12월 10일, 이틀 전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한 섬 내 유일의 편의점 앞에서 어린아이들이 군것질거리를 손에 쥔 채 뛰어노는 모습을 스케치한 '뛰노는 아이들…생기 찾아가는 섬'이란 기사를 마지막으로 연평도를 나왔다.

그 이후 한번도 연평도를 가보지 않았다. 최근 참사 10년이 된 것을 알았다. 그 때 기억들이 조각조각 스쳐지나갔다. 조만간 연평도를 한 번 가볼 지 모르겠다.

/이종만 기자 male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