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일본 근대 성격을 상징하는 물건, 총

일본이 5억 원짜리 총을 복제해서 독자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눈물겹다. 총포제작 성공의 관건은 총열을 만드는 것과 본체인 총신과 총열을 접합하는 것이었다. 쇠를 다루는 일이었으므로 칼을 만드는 장인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문제는 철판을 작고 동그랗게 말아 쇠파이프 형태의 총열을 만드는 기술과 총신과 총열을 연결하는 수나사와 암나사를 만드는 기술이 당시 일본에는 없었던 것이다. 형틀을 만들어 쇳물을 붓는 주물 방식으로 총열을 만들고 용접으로 총신에 붙여 보았지만 화약의 폭발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기술자 없이는 실패만 반복될 뿐이었다.

이때 책임자인 야이타 킨베의 딸, 16살의 와카사(若狹)가 중대한 결심을 한다. 아버지의 고민을 해결하려고 포르투갈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뒤 포르투갈 기술자와 함께 타네가시마로 돌아와 독자적인 총포제작이 완성된다. 철판을 말아 총열을 만들고 나사를 깍아 총신과 연결하는 원천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이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징표가 있다. 타네가시마의 니시노모테시(市) 구모노시로(雲之城) 묘지에는 「와카사의 忠孝碑」가 있다. 일본인들의 기술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농공상의 위계서열이 뚜렷했던 조선의 계급사회와 대비되는 장면이다.

개량된 일본의 철포는 분열되었던 일본의 통일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철포로 무장한 보병을 앞세워 전국시대를 평정한다.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통일을 이룩한 일본은 철포로 무장하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반도에 상륙한 왜병 넷 가운데 하나는 철포로 무장했고 불과 20여일 만에 전라도 일부를 제외한 한강 이남을 휩쓸었다.

당시 선봉을 맡았던 고니시 유키나카는 천주교도가 되어 십자가 문양의 깃발을 들고 포르투갈 종군신부를 데려왔다고 한다. 포르투갈산 총과 제작기술과 종군신부까지, 유럽의 무기와 과학과 종교가 한데 묶인 셈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임진왜란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대항해시대에 진입한 유럽과 연결된 해양문명의 대륙 침공이라는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그로부터 300여년 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거쳐 정한론(征韓論)을 외치면서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논리를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 조총으로 시작된 일본의 '총의 역사'는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동양 최초의 자국산 소총개발로 이어진다. 1880년 사쓰마 출신 포병장교인 무라다 츠네요시가 제작한 사정거리 1800m의 무라다 소총이 그것이다. 10년 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던 일본군의 주력무장이었다. 이처럼 총이야말로 일본 근대의 성격을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에 들어온 '뎃포'는 그냥 쇳덩이 취급을 받았다

대마도 영주가 조선에 선물로 보낸 '뎃포'는 한 차례 시범을 보이고는 무기고에 고이(?) 모셔졌다. 사정거리가 200미터에 불과하고 정확도가 떨어지며, 비가 오고 습도가 높으면 화약이 젖어 발사가 안 되는 점을 지적했단다. 또 화약을 총열에 재고 탄환을 밀어 넣는 등 과정이 번거롭고 재장전까지 시간이 걸리는 단점을 들어 화살에 비해 나을 게 없다고 평가했다는 거다. 화살과 비교할 수 없는 화력의 장점에 주목해서 개량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일찍부터 화약무기를 사용했던 전통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 총이 당시 대국이던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으로 전달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수용하는 태도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 나지 않았을까? 포르투갈로부터 홍이포를 받아들여 청나라의 북경 침입을 수차례 막아냈던 명나라의 전설적인 장군 원숭환의 사례는 왜 본받지 않았을까?

1717년 송시열의 유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만동묘이다. 만동묘는 조선개국을 도와준 명태조 주원장과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병해준 만력제(신종)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종)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그런데 숭정제는 재위 17년 동안 재상을 50여명이나 갈아치울 정도로 의심이 많고 결국 부정부패와 민생파탄으로 왕조를 파멸로 이끈 명의 마지막 황제였다. 청나라 황제인 누르하치와 치른 전투를 모두 이겨 결국 전사시킨 원숭환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잔인하게 죽인 이도 숭정제였다. 그런 인물을 죽은 지 200년이 넘도록 제사지내는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