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스위스 로잔에 자리잡고 있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를 처음 찾았던 때는 1969년 가을철로 기억된다. 그해 초 조선일보의 프랑스 특파원으로 파리에 부임한 후 IOC 출입기자증을 발급받기 위해 로잔을 찾았다. 레만 호수가에 면한 IOC 본부는 비디성관(城館)에 있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에게 로잔시가 본부로 사용할 옛 건물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 같은 로잔시의 선경지명으로 스위스의 로잔은 세계 스포츠의 중심도시이자 올림픽 운동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당시 IOC 위원장은 미국의 에이버리 브린디지였고 우리나라의 IOC 위원은 한국일보의 장기영 회장으로 국내에서는 거물급 인사였지만 IOC에서는 핵심멤버 그룹이 되지 못했을 때였다. IOC 위원은 국가를 대표하는 인사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명망있고 스포츠와 관련있는 인물들을 국가올림픽위원회(NOC)나 국제경기연맹(IF), 그리고 올림픽 메달리스트들로부터 선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첫번째 IOC 위원은 1955년 총회에서 선출된, 이승만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 부통령이었다. ▶그후 농구인이자 학자인 이상백씨와 장기영씨에 이어서 정계의 거물이자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김택수씨 때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쾌거가 있었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냈던 박종규씨가 세계사격대회를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치른 후 1984년에 IOC 위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여 태권도연맹 총재로 있던 김운용씨가 1986년 한국으로서는 6번째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2005년까지 20여년 동안 IOC 수석부위원장을 지내면서 사마란치 위원장과 명콤비를 이뤄 국제 스포츠계에서 실세로 군림했다. ▶김운용 부위원장은 IOC 최악의 추문으로 꼽히는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임할 때까지 IOC의 실세로 군림했다. 1973년 세계사격대회 유치작전 때 함께 일했던 인연이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유치까지 지속되어 40여년간 국제무대에서 협력했던 기억이 새롭다. 위원장을 필두로 10여명의 IOC 위원이 이너써클로 IOC를 끌고나갈 때 김운용 위원의 위상은 막강했으나 그후 IOC 내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소멸되고 말았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의 고위 인사들과 중량감 있는 국회의원들까지 일본을 찾아가 새로 취임한 스가 총리에게 도쿄올림픽을 도와주겠다는 생색성 발언을 남발하고 있다. IOC 위원장과의 친분으로 이너써클 멤버이기도 한 일본의 다케다 쓰네카즈(竹田恒和)와 토마스 바흐 위원장에게 도쿄올림픽을 도와주겠다는 한국의 생색내기가 어떻게 인식될 것인지 낯이 뜨거워진다. 그보다는 일본과 산적된 외교문제를 순리적으로 푸는 것이 올림픽을 돕는 첩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