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
맥아더 이야기에 압도되고 가려진
인천상륙작전에 얽힌 다른 이야기
무차별 폭격·포격·소탕전 장소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아무런 각색 없이 들려줄 방법 고민
▲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이 ‘미군 문서에서 드러난 인천상륙작전’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 박현정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이 ‘작전지역 주민이 겪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가 ‘사진으로 보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을 기념하는 행사와 토론회, 전시회 등이 국내외에서 개최됐다. 코로나19의 여파로 규모는 축소됐지만 전쟁을 승리로 기억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그치지 않았다. 인천에서도 어김없이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행사가 중구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진행됐다. 부석종 해군참모총장과 이승도 해병대 사령관도 맥아더 동상과 월미도 해군첩보부대 충혼탑을 찾았다.

이처럼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모임의 다른 한쪽에서는 '한국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는 생명평화포럼(상임대표 정세일) 행사가 지난 6월부터 5개월 간 계속되고 있다. 생명평화포럼이 한국전쟁 70주년을 성찰하고 평화도시 인천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한 6차례의 '인천시민평화강좌'와 4차례의 '평화순례'가 차분히 이어지고 있다. 오는 21일 제4회 평화순례(수봉공원, 인천상륙작전기념관)를 끝으로 반년에 걸친 장정을 마무리한다.

이 행사는 지난 10월 27일 남동구 YMCA 강당에서 열린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그 의미를 분명히 했다. 5개월간의 여정을 정리하면서 또다른 시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조명한 연구자들의 발제를 되돌아본다.

 

-평화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민간인 피해자'의 사연에도 귀 기울여야

이날 심포지엄에서는▲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의 '미국 문서에서 드러난 인천상륙작전'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의 '사진으로 보는 인천상륙작전' ▲박현정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의 '작전지역 주민이 겪은 인천상륙작전' 등 3개의 주제발표와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정세일 생명평화포럼 대표 ▲이성재 평화협정운동 인천본부 상임대표의 지정 토론이 진행됐다.

발제자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이면에 숨겨진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진실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인천상륙작전을 승리의 역사로 기록하는 전통적 평가에서 벗어나, 단지 상륙작전 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어간 피해자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전쟁과 냉전'의 상징인 인천이 '진정한 평화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전쟁 축제 대신, 미군 폭격으로 인한 피해자 위령제 함께 하기

강성현 교수는 '시각화된 영웅 맥아더, 시각화된 주민 대학살'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이 겉으로 드러내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

“인천 자유공원에는 월미도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맥아더로 시작해 맥아더로 끝나는 '냉전 경관'이 펼쳐져 있고, 상륙작전 재현행사도 '전쟁 축제'로 반복되고 있다. 안보를 진열하고, 지역경제 활성화도 끼워 팔고, 심지어 평화라는 말도 내걸었다”

그는 맥아더의 이야기에 압도되고 가려진 인천상륙작전에 얽힌 다른 이야기들에 대한 궁금증을 던지고 무차별 폭격과 포격, 소탕전이 전개됐던 장소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아무런 각색 없이 들려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된 인천 월미도에는 9월 10일부터 '무력화 작전'이 전개됐다. 북한 포병부대의 엄폐물을 불태우기 위해 네이팜탄 폭격과 기총소사 공격을 가했다. 30여 가구 중 상당수의 가족이 몰살당했고, 100여 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민간인 마을이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됐기 때문에 벌어진 '무차별 파괴'였다. 인천시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폭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전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았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들이 많아질 때, 인천과 섬, 바다의 '냉전 경관'을 '평화 공간'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상륙작전을 재현하는 전쟁 축제가 월미 공원과 바다에서 볼거리로 진열되는 모습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고 왜 불편한 지 이성적으로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을 때 자유진영의 세계평화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냉전분단' 경계에 인접한 지역 주민들의 삶과 생활권에 진짜 평화가 찾아온다고 주장한다.

그는 1957년 9월 '자유공원'으로 바뀐 '만국공원'의 제 이름을 찾아주기와 ▲맥아더 동상의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이전 ▲맥아더의 냉전적 자유와 정의의 가치 대신 인천을 대표하는 정치인 조봉암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사상과 실천을 보여주는 장소와 상징의 공론화 ▲전쟁 축제 대신 미군 폭격으로 인한 지역 피해자 위령제를 함께 하기 ▲분단 적대의 바다가 평화 교류의 바다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황해 평화축제'의 기획 등을 제안했다.

 

-제대로 기록된 역사가 민주시민 의식을 고취하고 미래를 올바로 마주할 수 있는 정도(正道)

박현정 연구원은 '작전지역 거주민이 경험한 인천상륙작전'에서 “상륙작전지역 안에 거주했던 주민들에게는 '전승' 보다는 '학살'의 기억으로 재현된다”고 강조했다.

단지 꾸물댄다는 이유로 무차별 사격을 당해 즉사한 임산부를 목격한 이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해산하기 위해 친정집에 왔다가 “나오라”는 상륙작전 부대원의 명령에 출산의 진통으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해 사살된 덕적도 주민 '한상렬'의 피맺힌 사연이다.

덕적도 민간인 희생자들은 인천상륙작전 전단(戰團)이 인천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섬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장하지도, 지방좌익도 아닌 민간인을 적(敵)과 아(我)의 식별이 어려운 전투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무차별 총격으로 희생되고 집과 가정이 파괴됐다.

월미도로 가는 수로에 접해 있는 덕적도와 영흥도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사전 작전으로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나오는 이른바 '이(李)작전'과 'X-Ray' 작전이라는 첩보전에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해군육전대와 해군첩보대는 정보수집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예상치 못한 작전의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최소 41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했다.

“아~세월은 잘 간다 야야야~ 나 살던 곳 그리워라~” 학살지로 끌려가던 이들이 죽기 전 뱃머리에서 부르던 구슬픈 노랫소리를 주민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섬에서 소라를 잡는데 그냥 바글 바글해요”. 바닷가 바위에서 살해당한 민간인 시신들이 바다로 떨어졌고, 하얗게 가라앉은 시신들의 뼈를 빨아 먹은 소라가 지천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더럽다고 소라를 안 잡는거야. 나만 횡재한거지. 소라 무진장 잡았어”.

덕적도와 그 인근에서 사망한 희생자는 모두 민간인이었다. 사전 경고도 없이 비무장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하고 구금됐던 민간인들을 '즉결 처형'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전승으로, 맥아더를 영웅, 민족의 구원자로 높이는 전통적 기억이 지배했던 5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작전의 과정에서 생긴 희생은 불법적으로 자행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지, 전쟁의 불가피한 결과물이 아니며 희생의 규모도 결코 작지 않은 만큼 이제라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 연구원은 “제대로 기록된 역사야 말로 성숙한 민주시민 의식을 고취하고 미래를 올바로 마주할 수 있는 정도”라고 역설한다.

 

-'성공한 상륙작전'이라는 군사적인 사고 틀에서 벗어나 '평화'를 중심에 둔 연구 필요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미국 문서에서 드러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은 정말 비밀작전이었는가?, 그래서 민간인 대피 또는 사전 경고가 불가능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1950년 9월1일자 오스트레일리아 신문에는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기사가 게재됐다. 인천상륙작전 이전인 9월 7일 인천 시내 폭격이 시작돼 21일까지 이어졌다. 13일 오전부터 12.2시간 폭격을 계속했고, 14일 오전부터 월미도와 인천시에 59.8시간 동안 폭격작전을 전개했다.

9월 14일 밤 인천지역에 폭탄, 네이팜탄, 기총소사가 78회 이뤄졌고, 월미도 폭격 직후 인천지역에 100개의 1000-1B 범용폭탄을 투하했고, 115개의 로켓을 공격했다. 비행기 출격횟수만 189차례였다. 9월 15일 오후에는 1분당 100여발 씩 20분 동안 6천여 발을 인천으로 발사했다.

이처럼 엄청난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9월 10일 월미도 폭격에서 미 공군은 민간인 피해를 인지했지만 무차별 폭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월미도 주민들에게 '폭격 경고'를 위한 삐라나 경고 방송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태평양함대사령부 평가단은 월미도 폭격이 '2차 세계대전보다 효과적인 폭격 사례'라고 평가했다.

인천시가지의 융단폭격은 정밀 타격을 하는 전술폭격이 아니라 광범위한 피해를 주는 전략폭격이었고, 민간인을 목표로 삼은 기총소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미 해병1사단은 포로처리 원칙에서 북한인민군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 모두를 '적'으로 간주했다.

전 연구원은 “전후 맥아더의 리더십과 결부된 '성공한 상륙작전'은 '한국을 구한 위대한 상륙작전'이라는 틀에 박힌 서사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 그 구조에서 폭격으로 희생된 민간인의 역사는 배제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자료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연구돼야 한다는 당위성, 군사적인 사고 틀에서 벗어난 평화를 중심에 둔 새로운 서사가 요구된다”고 밝혔다.

 

/정찬흥 인천일보 평화연구원 준비위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