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구국의 뜻, 천인공노할 만행에 사그라지다

일 경찰, 1908년 3월15일 소난지도 급습
100여명 전사·실종으로 화성의진 와해
절벽서 투신했으나 나뭇가지에 걸려 생존

1년여간 떠돌다 경술국치 직전 귀향
일 헌병대에 구국동지회 조직 사실 발각
체포하러 온 헌병 2명 처단 후 서울로 피신

일제, 3·1만세의거 거세지자 폭력 진압
제암리 학살에 휘말려 부부가 함께 스러져
▲ 소난지도에서 열린 제6회 '의병의 날'과 '소난지도 의병항쟁 110주년' 추념행사 (2016. 6. 1.).
▲ 제암리 3·1만세의거 후 학살당한 23인의 어울무덤.
▲ 제암리 3·1만세의거 후 학살당한 23인의 어울무덤.

◆ 당진지역에서 반일투쟁 벌이다

1908년 봄부터 경기도와 인접한 당진 일대에는 의병활동이 활발했다. 3월9일에는 의병들이 당진 읍내에 들어와 밀정이라 소문이 났던 박사원(朴士元)을 붙잡아 주민들 앞에서 본보기로 총살시킨 일이 있었다. 홍성경찰분서에서는 의병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활동하다 사라지곤 하는 상황에 대하여 고심하던 중, 소난지도에 의병부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3월13일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다수의 보조원으로 편성된 경찰대를 아가츠마 다카하치(上妻孝八)의 인솔 하에 당진지역으로 파견하여 3월17일부터 23일까지 1주일 동안 의병 진압에 나설 계획이라는 문서까지 있지만 그 내용은 발견되지 않고, 3월15일 소난지도 의병에 관한 내용 중, 매우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만 번역되어 있다.

“소요손해주표(騷擾損害週表)

융희 2년 3월 17일부터 23일까지

공주경찰서 홍주분서

* 폭도 사상(死傷) 개수(槪數) - 사 41명, 상 9명

* 한인 순사 부상 1명은 3월 15일 오전 6시경 당진군 소난지도에서 전투 중, 전두부(前頭部)에 맹관상(盲貫傷)을 입었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권. 394~395쪽)

▲ 홍원식·정주원·지석홍 의병장에 대한 일제앞잡이 충남관찰사 최정덕이 내부대신 송병준에게 보고한 문서가 실린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0. 22.).
▲ 홍원식·정주원·지석홍 의병장에 대한 일제앞잡이 충남관찰사 최정덕이 내부대신 송병준에게 보고한 문서가 실린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0. 22.).
▲ 홍원식의 화성의진에 참여, 유형 10년이 선고된 이연태 의병 판결문 (경기재판소, 1908. 5. 1.).
▲ 홍원식의 화성의진에 참여, 유형 10년이 선고된 이연태 의병 판결문 (경기재판소, 1908. 5. 1.).

 

◆ 제2차 소난지도 의병투쟁

홍원식 의병장이 이끄는 화성의진은 일본 헌병분견소, 일본 경찰주재소 등에 대한 공격은 물론, 일본군경에 빌붙어 밀정 노릇을 하는 부왜인 처단을 하고는 사라지곤 하였다. 일본군경은 밀정들을 통하여 마침내 화성의진의 본거지가 소난지도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의병 진압작전을 전개한 것은 3월15일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19권은 일제의 <폭도에 관한 편책>을 번역한 것인데, 3월17일과 3월20일자 홍주경찰분서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내용이 번역되지 않고 누락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 '홍경비(洪警秘) 제143호의 1'(1908. 3. 17.)의 주요 내용을 번역해 보면, 당시 소난지도 의병투쟁의 전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달 13일 당서 순사 아가츠마 다카하치(上妻孝八) 외 14명이 소토(掃討)를 위해 파견되어 적의 근거지로 인정되는 당진군 소난지도를 수사하였는데, 15일 오전 6시 적은 일본형 범선 1척과 한선 1척을 포구에 계류시키고 상륙해 있었습니다. 우리 수사대를 보고 바로 발포함에 이에 응전했는데, 그 지점이 자못 우리에게 불리했습니다. (중략) 전투가 9시간에 걸쳐 적은 드디어 시신 41구를 버리고 궤주하였습니다.” (내부경무국,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3. 17.)

홍주경찰분서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보고한 '홍경비 제143호의 3'(1908. 3. 20.)에는 홍원식 의병장과 화성의진의 선봉장 박원석(朴元錫)에 대한 나이와 출신지가 나와 있으나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3일 전의 보고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제2차 소난지도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이 41명이라는 것이다.

“오후 3시에 적장 홍원식(洪元植, 경기도 안성인으로 나이 50 정도)과 선봉장 박원석(朴元石, 경기도 수원인으로 나이 30 정도) 이하 41명은 육상 또는 부상 후에 해상에서 죽었습니다. 기타 바다에 투신하여 행방불명인 적세(賊勢)는 상세히 알 수 없지만 50명 내외로 바다 속에 숨은 자도 도저히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면 전멸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내부경무국,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3. 20.)

일본 경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제2차 소난지도 전투에 임했던 화성의진은 약 100명 정도였는데, 41명이 순국하고, 50여명이 바다에 투신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수의 의병들이 절벽에서 몸을 던져 실제로는 100여명에 달하는 의병이 전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홍원식은 절벽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려 했으나 난간의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1906년과 1908년 2차례 소난지도 전투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났던 것이다.

을사늑약 이후 소난지도에서 대규모 의병투쟁은 2차례 있었던 것이니, 그 1차는 1906년 8월24일(음력 7월5일) 면천·당진·서산·화성·홍주 의병 120여명이 관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나무 실은 배로 위장해서 기습해 오자 전투 중,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고 유곡 선생은 피체되어 면천감옥에 갇혔던 것이며, 2차는 1908년 3월15일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었으니, 소난지도에서 순국한 의병은 150여명이라고 전하는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 귀향하여 구국동지회 조직하다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는 동료 의병들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홍원식 의병장은 이제 혈혈단신의 신세로 전락하자 의병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동료들을 규합하여 적어도 1908년 8월 말까지 소규모 의병투쟁을 이어 나갔음이 1908년 10월22일 일제앞잡이 충남관찰사 최정덕이 내부대신 송병준에게 보고한 문서에 나타나 있다.

“적도상황(賊徒狀況)에 관한 건

지난 달 2일자 「경비발(警秘發) 제760호」로써 통달한 작년 7월 적도 봉기 이래 금년 8월 말일까지의 기간에 당 관내 적도의 상황을 조사한 바는 다음과 같음.

1. 적도봉기의 원인

원래 초적(草賊)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각처를 출몰 횡행하여 근절되지 않던 차에 작년 7월의 양위(讓位) 사건 및 이에 따른 정변(政變)은 적도 봉기의 동기가 됨으로서 초적은 폭도화하고, 해산병 또한 이에 가담하여 은밀히 무뢰 도식배를 규합하여 하나의 단체를 조직, 점차 그 세력이 창궐을 극한 것은 무자악한(無資惡漢)의 도배가 의병을 빙자하여 부화뇌동하여 그 재화를 크게 한 것도 그 원인이었다.

2. 여러 차례 되풀이한 수괴자의 성명·경력 및 폭거 중의 행동

(1) 수괴 홍원식(洪元植)은 경기도 수원의 양반이라고는 하나 자산 없고 또 아무런 관력(官歷)이 없었다. 다만 비교적 학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28쪽)

1908년 충남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던 홍원식 의병장은 제2차 소난지도 전투 후 1년여 동안 떠돌다가 경술국치 직전 귀향하여 제암리 기독교 책임자 안종후(安鍾厚), 천도교 책임자 김성렬(金聖烈)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안간힘을 쏟고자 했으나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후 어느 날 구국동지회 활동이 일본 헌병대에 탐지되어 화성군(현 화성시) 팔탄면 고주리(古州里) 근처로 피신하던 중, 체포하러 온 일본 헌병 2명을 처단하고 서울로 피신했다.

홍 의병장은 세월이 꽤 지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고 있었다.

 

◆ 제암리 3·1만세의거

1919년 3월 제암리는 기독교 교회당이 있었고, 농촌으로서는 문명이 일찍 들어온 곳이었다. 3월10일경 안종린(安鍾璘)·안정옥(安政玉) 등이 독립선언문과 그 외의 격문을 입수하여 3월25일 동리 사람들과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후 4월5일에는 발안(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 발안장은 팔탄면으로서 면사무소와 주재소, 그리고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제암리는 발안장에서 1.5㎞쯤 떨어진 곳으로 한 동리같이 왕래하였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제암리 사람도 끼어 있고 발안장터 사람도 있었다.

발안장터의 만세시위를 살펴보면 이날 오후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1000여명이었으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행진하였다. 시위 행렬은 마침내 일본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군중은 격노하여 일본인 경찰부장이 시위 행렬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 근처에 있던 일본 거류민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 일본군의 제암리학살에 희생되다

이튿날부터 수원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쏟아져 들어와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갔는데, 제암리 사람들도 몇 번이고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문초를 받았으나 모두 부인하여 그대로 풀려 나왔다.

4월15일 오후 일본군 아리타(有田) 중위가 인솔하는 군인 약 20명이 제암리를 포위하고 그 마을 남자는 예배당으로 모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40세 이상 되는 남자만 모이라 하였으나 사람이 모이지 않자 20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모이라 하였다. 영문을 모르고 예배당에 모인 마을 남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일본군은 문을 안팎으로 잠그고 못질을 한 후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예배당을 휩싸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뛰쳐나오려고 아비규환 생지옥을 연상케 하였다. 다행히 뛰쳐나온 사람은 밖에서 대기하던 일본군이 총으로 쏘아 죽였다. 밖에서 통곡하던 여인 2명마저 총으로 쏘아 죽였으니, 모두 23명이었고, 이들 23명 속에는 2차례 소난지도 전투에서도 불사조였던 홍원식 의병장과 그의 아내 김씨도 있었다. 부부는 43세 동갑이었다.

정부에서는 홍원식 의병장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의 아내 김씨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홍원식 의병장은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2012년 3월)로 선정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