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1917년 6살 되던 해에 인천 내리로 내려왔는데, 뜰 한구석에 서 있는 수도꼭지를 틀면 맑은 물이 쏟아져 나와 몹시 신기했다. 이사를 오기 전 서울 관수동 집에서는 우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 서울 종로 복판보다 인천 내리 언덕배기에 수돗물이 먼저 들어온 셈이다.”

故 신태범 박사가 <인천 한세기>란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렇듯 인천은 개항(1883년)을 맞아 이미 100여년 전부터 '첨단 혜택'을 받았다. 동네마다 우물을 파서 물을 쓰던 때, 오늘날과 같은 수도를 이용했다는 게 놀랍다. 물론 그 혜택은 '좀 살던' 극히 일부 가정에 국한됐다. 인천에 날로 늘던 일본인과 선박 등을 위해 개설한 수도는 대다수 조선인에겐 '그림의 떡'이었다고 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인천엔 우물이 적었다. 이뿐만 아니라 수질도 나빴다.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인해 물을 확보하는 게 큰 고민거리였다. 사람이 물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인천에 수도를 연결하는 일이 중요했다. 일제는 결국 1906년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10년 10월30일 마침내 인천 수도국산(水道局山)에서 통수식(通水式)을 거행했다. 바로 엊그제 110주년을 맞았던 셈.

산 정상에 상수도시설이 있어 수도국산이란 이름을 붙였다. 동구 송현동과 송림동에 걸쳐 있는 수도국산의 본디 이름은 송림산(松林山)이다. 산 언덕에 소나무가 많아 이렇게 불렀다. 그런데 산 정상에 1908년 노량진과 송현동을 연결하는 송현배수지를 완공하면서 수도국산으로 변했다. 인천에 상수도를 처음 공급하면서 고유의 산 이름마저 몰아냈다. 이후 노량진 수원지 정수시설을 1910년 10월 준공해 그해 12월1일부터 서울∼인천 간 수돗물 급수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수도국산엔 수도시설이 남아 있는데, '송현배수지'다. 인천 최초의 상수도시설로서, 2003년 10월 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23호로 지정됐다.

수도국산 주변은 '달동네'로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엔 일본인들에게 입지를 잃고 쫒겨난 이들이 찾아들었다. 이어 해방 후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비탈부터 산꼭대기까지 작은 판잣집이 다닥다닥 들어서면서 3000여 가구 영세민 삶터로 변모했다. 가난한 서민들의 보금자리였던 이 곳의 주거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수도국산이란 말과는 역설적이게도 물 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여기에 살던 상당수는 열심히 일해 신흥개발지로 옮겨 갔다. 이래 저래 수도국산은 마치 '인천인의 고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수도국산 달동네는 1990년대 중반부터 송현동과 송림동 일대 개발로 점차 사라졌다. 산비탈을 깎은 터엔 대형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다. 동구는 그 흔적을 남기자는 차원에서 2005년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을 열었다. 박물관에선 지난했던 수도국산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한다. 아무튼 수도국산은 인천 역사의 '산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