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마음은 행동으로 옮겨진다
▲ '늘 도망 다니기에 보따리를 쌌다'는 동학 2대 교주 최보따리 최시형(崔時亨,1827~1898).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해월은 1861년 6월 선생을 찾아뵙고 제자가 되었다.
▲ '늘 도망 다니기에 보따리를 쌌다'는 동학 2대 교주 최보따리 최시형(崔時亨,1827~1898).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해월은 1861년 6월 선생을 찾아뵙고 제자가 되었다.

‘불연기연’

‘연’(然)은 ‘그렇다’는 의미다. ‘불연’(不然)은 ‘그렇지 않다’이고, ‘기연’(其然)은 ‘그렇다’이니, 불연기연은 ‘그렇지 않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이다. 즉 그러한 이치로 보면 그렇고, 그렇지 않은 이치로 보면 또 그렇지 않다는 역설의 논리. 선생은 그 도입부를 이렇게 썼다.

“노래하여 말하기를, ‘영원한 만물이여, 제각기 이루어졌고, 제각기 형태가 있도다.’ 얼핏 본 대로 따져보면 그렇고 그럴듯하지만 하나부터 온 바를 헤아려보면 그 근원이 멀고 심히 멀어서 이 또한 아득한 일이어서 미루어 말하기 어렵다.

내가 나를 생각하면 부모가 여기에 있고, 뒤의 후대를 생각하면 자손이 저기에 있다. 오는 세상에 결부시켜보면 내가 나를 생각하는 이치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지나간 세상을 더듬어 보면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되었는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세상 이치가 이렇기에 선생은 “아아, 이 같은 헤아림이여, 그러한 이치(其然)로 보면 그렇고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이치(不然)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다(噫 如斯之忖度兮 由其然而看之 則其然如其然 探不然而思之 則不然于不然)”고 하였다. 아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치고 이런 의문 한번 안 품어본 사람은 없을 듯한 보편적인 의문이다.

선생의 논의를 더 들어본다.

“알 수 없으며, 알 수 없노라. 나면서부터 그런 것인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인가? 나면서부터 알았다 해도 마음은 깜깜해 풀리지 않고 저절로 그리 되었다 해도 이치는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무릇 이러하니 그렇지 않은 까닭(不然)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며, 그런 까닭(其然)을 알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에 그 끝을 헤아려 보고, 그 처음을 헤아려 보면 사물이 사물이 되고 이치가 이치 되는 큰 일이 얼마나 멀고도 먼 일인가. 하물며 이 세상 사람들아! 어찌 앎이 없으며, 어찌 앎이 없으랴.”

선생은 이렇게 맺음말을 적었다.

“이러므로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그렇지 않음(不然)이라 하고, 쉽게 단정하는 것은 그러함(其然)이라 한다. 사물의 근원을 탐구해보면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으며 또 그렇지 않은 일이요, 사물이 이루어진 것에 의지해보면 그렇고 또 그러한 이치가 있다.”

‘불연기연’은 세상일을 풀어가는 묘한 진리를 담고 있다. 기연은 ‘부정을 통한 대긍정’의 의미로 해석된다. 전부 부정적인 것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게 하나도 없다는 대긍정이다.

 

‘좌잠’

‘좌잠’은 마음을 닦는 요령이다. 제자 강수(姜洙)가 찾아와 수도 절차를 묻자 써준 글이다. 5언으로 간단하게 풀어내 명쾌하다. 선생은 말과 뜻에 얽매이지 말고 정성(誠)_공경(敬)_믿음(信) 석 자에 의지하란다. 즉 마음공부를 하란 말이다.

마음공부를 하라는 이 글은 우리 인생길의 좌우명으로 부족함이 없다. 자기 삶에 정성을 다하고 사람을 공경하며 하는 일에 믿음을 갖는 마음은 몸으로부터 나온다. 즉 모든 마음은 행동으로 옮겨진다. 몸의 실천 없이는 마음공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이 풀어낸 최고의 공부 방법, 그것은 강건한 몸에서 힘차게 솟는 마음공부인 셈이다. 강수는 후일 최시형을 도와 동학 재건에 온몸을 바친다. 좌잠은 아래와 같다.

‘우리 도는 넓고 간략하니 吾道博而約/많은 말과 뜻이 필요 없네 不用多言義/별로 다른 도리가 없으니 別無他道理/정성(誠)_공경(敬)_믿음(信) 단 석 자(字) 誠敬信三字/이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這裏做工夫/터득한 뒤에라야 깨달음 있어 透後方可知/잡념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不_塵念起/오직 깨달음 더딤을 걱정하라 惟恐覺來知’

선생이 이러한 말씀들로 포교를 시작했다. 186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약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고 곧 놀라울 정도로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1863년 유림은 ‘동학배척통문’을 만들어 사방으로 돌렸다. 동학을 배척하는 유림의 아래 글 속에 동학이 세력을 얻은 이유가 있다.

“귀천과 등위를 차별하지 않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유박(_薄_동학의 모임 장소인 집강소)을 설치하니 홀아비와 과부들이 모여들고 돈과 재물을 좋아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우니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기뻐하였다.”

정녕 저러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선생은 공권력에 의해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864년 3월10일, ‘좌도난정률(左道正律)’이라는 죄목으로 대구 장대(지금의 달성공원 안)에서 참형을 당했다. 선생의 머리는 남문 밖에서 사흘 동안 조리돌림을 당했다. 좌도난정률은 ‘그릇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게 한 죄’다. 이후 동학농민운동가 김개남이 1893년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1895년에 처형당했다. 늘 동학을 알리느라 보따리를 자주 쌌다는 최보따리, 동학 2대 교주 최시형도 1898년 6월 2일 지금의 돈화문로 26(묘동 59-8)에서 스승과 같은 죄명으로 교수형을 당했다.

이제 우리는 누가 ‘그릇된 도’이고 누가 ‘정도’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잊으면 또 다시 ‘그릇된 도’가 ‘정도’를 해치는 세상이 온다.

다음 회부터는 담헌 홍대용을 연재합니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