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해 9월 '이경성을 회고하다' 전이 열렸을 때, 관객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냈다. 과연 '이경성'은 누굴까? 호기심은 이내 잦아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9대(1981∼1983)와 제11대(1986∼1992) 관장으로 재임한 그는 국내 첫 '미술전문가'였다. 1986년 과천관 건립을 주도했고, 학예연구사 제도 도입 등 초창기 미술관의 제도적 기틀 구축·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이 전시에선 그의 현대미술관장 재임 시절 자료를 돌아보면서, 한국 미술관 제도 형성과 전개 과정을 가늠했다. 친필 원고, 관장실 사용 가구와 애장품, 직접 그린 그림 등 200여점은 미술인 이경성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줬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평생에 걸친 그의 활동 여정이 한국 미술사와 미술관 발전 선상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되짚어 보는 자리였다. 이경성 탄생(1919∼2009) 100주년과 현대미술관 50주년을 기념했다. 그의 행로를 밝힌 전시회는 지난 3월까지 성황리에 진행됐다.

이경성을 수식하는 단어엔 '최초'가 많다. 국내 첫 미술비평문을 썼다. 우리나라 1호 미술평론가인 셈. 처음으로 미술전문인 관장을 지냈으며, 국내에 미술사학과를 처음으로 만들기도 했다. 아울러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맡아 1946년 4월16일 개관 작업을 총괄하는 등 초창기 운영의 밑그림을 그렸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자유공원에 있던 향토관 건물을 개조한 우리나라 첫 공립박물관이다. 인천시립박물관도 지난해 11월 '석남 이경성, 아름다움에 美치다'란 작은 전시를 열었다. 인천에서 시작된 그의 삶과 발자취를 조명했다.

석남(石南) 이경성은 인천 화평동에서 태어났다. 1937년 일본 와세다대 법률과에 입학했지만, 역시 인천 출신 미술사학의 거장인 선배 고유섭과 교류하면서 미술사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법률 공부를 하기보다는 도쿄의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미술사와 미술이론을 공부하기로 했다. 결국 와세다대 법률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재판소에서 잠시 일하다, 1942년 12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와세다대 문학부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는 1951년 '우울한 오후의 생리-전시미술전(戰時美術展)을 보고' 발표를 시작으로 미술비평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이화여대와 홍익대 교수를 거쳤으며, 신진작가를 위한 석남미술상을 매년 시상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이처럼 그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초대 관장인 석남의 업적을 기리는 '이경성 미술이론가상' 수상식을 지난 10월30일 열었다. 이 상은 1989년부터 석남 스스로 재원을 마련해 시작됐다. 선생 타계 이후엔 그의 업적을 기리고 국내 미술이론가들을 격려하기 위해 후학들의 자발적 발의로 제정됐다. 올해(제7회) 수상자는 국립현대미술관 이지은 학예연구사다. 아무쪼록 석남을 뛰어넘는 후학이 많이 나와 우리나라 미술 관련 토대를 튼튼히 다졌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