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 아시안문화콘텐츠진흥원 사무총장

자신의 죽음도 초월하여 '죽음의 이유'를 변하고 살아야 한다는 권유와 설득에도 초연하고 덤덤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 영혼의 반이라도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철학의 깊이 유무와 무관하게 테스 형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가황(歌皇) 나훈아가 부럽습니다. 평생 램프를 들고 다니며 현자를 찾으며 절대 권력의 부름(알렉산드로스)에게도 '햇빛만을 가리지는 말아 달라'던 디오게네스가 가진 무소유의 언덕에 비빌 공간을 찾고,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처럼 같은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련만 깊이 잠들어 있는 문화는 겨울을 부를 뿐 위태로운 영혼을 달래주지 않습니다.

태공망 여상은 우리가 다 아는 그 강태공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주나라 문왕의 스승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무왕을 도와 공과를 날린 공적으로 제나라의 제후를 지내게 되는 재상이자 병법을 쓰기도 한 지략가지요. 가정을 도외시하여 아내를 떠나보낸 동해의 낚시꾼을 책사로 봉한 문왕의 지략은 무왕의 정복 기술로 인하여 큰 빛을 발하며 역사가 되지요. 그 중심에 태공망 여상이 있었지만 후대에 사람들은 그를 세상을 낚은 낚시꾼으로만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강태공은 '물고기가 아닌 정치문화를 낚는 세상낚시꾼들의 별칭'이지요.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본/ 첫 서리꽃 겨울 얼음/ 아늑한 추위들을 엮어 밥상 같은 봉분에 바치는 산 자/ 죽어서도 산 사람의 밥상을 차리는 봉분/ 그 봉분과 밝은 잠과 추위 속에서 단단해진 꽃/ 삶을 캐내어 집으로 가는 사람들

문득 '무덤 사이에서'라는 시에서 시인 박형준이 봉분과 밥상을 떠올리며 우리의 살아 있음의 경외와 돌아갈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제 오래된 라디오의 카세트테이프에서는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수동의 기계음으로 노라 존스와 스팅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라디오의 기능을 상실하고 카세트테이프만 물어뜯는 고물 트랜지스터는, 스팅의 'Englishman in New York'에서 툭툭 튀면서 뉴욕에 온 영국 촌놈의 형색을 그리는 것이, 꼭 세상의 둔부를 뚝 잘라 아무렇게나 몸에 걸쳐 입은 디오게네스의 생의 자유를 떠오르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티탄과의 전쟁으로 신들의 세계를 점령한 제우스의 용기가 신들의 세계에 종말을 고하고 인간들 세계의 문을 열었다면, 소크라테스의 용기 있는 죽음과 디오게네스의 유유자적은 인간의 문을 열었습니다. 삶의 시간들이 토해내는 고단한 일상들을 쉬게 할 지혜를 우리는 고전에서 자주 얻어옵니다. 더불어 태공망 여상에게서 무언가를 이루기 전에 우리가 꿈 꾼 시간의 흔적들을 재우고, 박형준 같은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일깨워주는 일상 속 밥상머리의 중요함도 배워옵니다. 그 배움 사이를 뚫고 겨울이 목을 내밀 때 가을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따스한 아랫목을 그리워하는 겨울의 문화여행자는 햇살을 진정 온몸에 태우고 싶었던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의 삼고초려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모든 권유에도 초연하던 낚시꾼 노인이 문왕의 권유에 궁으로 간 까닭은, 자신이 평생 꿈꿔 온 이상이 마치 원조 족발집의 달콤한 족발처럼 맛있었을 때문일 터, 디오게네스의 초연과 절대 비교하지는 않기로 합니다. 서양의 초연이 동양의 도와 한 축을 이루고 있지만 동양의 도에는 자신의 뜻과 의지가 관철되면 세상으로 나가는 사림(士林)의 기개가 함께 밧줄을 타니까요.

대신 스팅의 섬세함과 노라 존스의 덜컹거리는 쇳소리가 지금 우리의 각박한 현실과 격변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 나라의 문화현실에 우려를 쥐어짜면서, 생의 불손한 그림자 대신 맑은 햇살 하나를 한 움큼 들어 던져넣어 주는 바람이 되겠습니다.